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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임화 시인 / 어린 태양(太陽)이 말하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1.

임화 시인 / 어린 태양(太陽)이 말하되

 

 

아지 못할 새

조그만 태양이 된

나의 마음에

고향은

멀어 갈수록 커졌다.

 

누구 하나

남기고 오지 않았고,

못 잊을

꽃 한 포기 없건만

기적이 울고

대륙에 닿은 한 가닥 줄이

최후로 풀어지면,

그만 물새처럼

나는 외로워졌다.

 

잊어버리었던 고향의

어둔 현실의 무게가

떠오르려는 어린 태양을

바다 속으로 누를 듯

사납다만.

 

나무 하나 없는

하늘과 바다 사이

구름과 바람을 뚫고

하룻 저녁

너른 수평선 아래로,

아름다이 가라앉는

낙일(落日)이,

나의 가슴에

놀처럼 붉다.

 

이제는 먼 고향이요!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나를 내치고,

이내 아픈 신음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대의 마음은,

너무나 진망궂은

청년들의 운명이구나!

 

참아야 할 고난은

나의 용기를 돋우고,

외로움은

나의 용기 위에

또 한 가지 광채를 더했으면……

 

아아, 나의 대륙아!

그대의 말 없는 운명 가운데

나는 우리의 무덤 앞에 설

비석의 글발을 읽는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옛 책

 

 

무더운 여름 한밤의 깊은 어둠이

모색의 힘든 노동에 오래 시달린

내 노력의 전신을 지그시 누른다.

 

꺼칠한 눈썹 아래 푹 꺼진 두 눈,

한 끝이 먼 희망의 항구로 닿아 있어,

아이 때 쫓던 범나비 자취처럼

잡힐 듯 말듯 젊은 날의 긴 동안을 고달피던

꿈길 아득한 옛 기억의 맵고 쓴 나머지를

다시 그러모아 마음의 헌 누각을 중수(重修)하려

몇 번 힘을 내고 눈알을 굴려 방안의 좁은 하늘을 헤매었는가?

 

그러나

검은 눈썹은 또다시 피로에 떨면서,

길게 눈알을 덮고,

주검의 억센 품안에서 몸을 떨쳐 휘어나려

오늘도 어제와 같이 고된 격투에 시달린 육신은

푸근히 식은땀의 샘을 터치며

쭉 자리 위에 네 활개를 내어던진다.

그러면 벌써 나의 배는 파선하고 마는 것일까?

한 조각의 썩은 널조차 나를 돌보지 않고,

그것 없이는, 정말로 그것 없이는,

평탄한 뭍에서도 온전히 그 길을 찾을 수 없는

진리에로 향한 한 오리 가는 생명의 줄까지도

인제는 정말로 끊어져,

손을 들어 최후의 인사를 고하려는가?

오오, 한 줌의 초라한 내 머리를 실어 오랜동안,

한 마디 군소리도 없이 오직 나를 위하여 충실하던 내 조그만 베개

반딧불만한 희망의 빛깔에도 불길처럼 타오르고,

풀잎 하나 그 앞을 가리어도 천(千) 오리 머리털이 활줄같이 울던

청년의 마음을 실은 내 탐탁한 거루인 네가

이제는 저무는 가을의 지는 잎 되어 거친 파도 가운데 엎드러지면서,

그 최후의 인사에 공손히 대답하려는가?

 

나는 다시 한 번 온몸의 격렬한 전율을 느끼며,

춥고 바람 부는 삼동의 긴 겨울밤,

그렇게도 잘 새벽 나루로 나를 나르던,

내 착하고 충성된 거루의 긴 항행을 회상한다.

굴욕의 분함이 나를 땅바닥에 메다쳤을 제도,

너는 보복의 뜨거운 불길을 가지고 나를 일으키었고,

패퇴의 매운 바람결이

내 마음의 엷은 피부를 찢어,

절망의 깊은 골짝 아래 풀잎같이 쓰러뜨렸을 그때에도,

너는 어머니와 같이 나를 달래어 용기의 귀한 젖꼭지를 빨리면서,

아침해가 동쪽 산머리에 벙긋이 웃을 때,

일지도 않게 늦지도 않게 새벽 항구로 나를 날랐었다.

 

지금

우리들 청년의 세대의 괴롭고 긴 역사의 밤,

검은 구름이 비바람 몰고 노한 물결은 산더미 되어,

비극의 검은 바다 위를 달리는 오늘

그 미덥던 너도 돛을 버리고 닻줄을 끊어,

오직 하늘과 땅으로 소리도 없는 절망의 슬픈 노래를 뜯어,

가만히 내 귓전을 울린다.

오오, 이것이 청년인 내 주검의 자장가인가?

 

나는 참을 수 없는 침묵에서 몸을 빼어 뒤척일 때,

거칫 손에 닿는 조그만 옛 책자(冊子)를 머리맡에서 집었다.

 

책장은 예와 같이 활자의 종대(縱隊)를 이끌고,

비스듬히 내 손에서 땅을 향하여 넘어간다.

 

이곳 저곳에 굵게 내리그은 붉은 줄,

틈틈히 빈 곳을 메운 낯익은 내 서투른 글씨,

나는 방안 그득히 나를 사로잡은 침묵의 성(城)돌을 빼는,

그 귀여운 옛 책의 날개소리에 가만히 감사하면서,

프르륵 최후의 한 장을 헛되이 닫을 때,

나는 천지를 흔드는 포성에 귓전을 맞은 듯,

꽉 가슴에 놓인 영낭(永囊)을 부여잡고 베개의 깊은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N. L. 저(著) 『1905년의 의의』

 

1905년!

1905년!

 

베개는 노래의 속삭임이 아니라, 위대한 진군의 발자국 소리를,

어둠은 별빛의 실이 아니라, 태양의 타는 열과 눈부신 광채를,

고요한 내 병실에 허덕이는 내 가슴 속에 들어붓고 있다.

 

저 긴, 긴 북국(北國)의 어두운 밤,

얼마나 더럽고 편하게 그자들은 살고,

얼마나 깨끗하고 괴롭게 그들은 죽었는가?

밝은 것까지도 밤의 질서로 운행되어가는

이 괴롭고 긴 밤,

주검까지도 사는 즐거움으로 부둥켜안은 청년의 아픈 행복을,

나는 두 눈을 감아 아직도 손바닥 밑에 고요히 뛰고 있는,

내 정열의 옛 집에서 똑똑히 엿들었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林和 , 1908. 10. 13 ~ 1953. 8. 6] 시인

190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보성중학교에서 수학. 1927년 《朝鮮之光(조선지광)》에 〈화가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첫 시집 『현해탄』이후 『찬가』 등의 시집과 평론집 『문학의 논리』를 간행. 카프,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으며 1947년 월북하여 1953년 처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