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벽 시인 / 말(馬)
말님 나는 당신이 웃는 것을 본 일이 없읍니다. 언제든지 숙명을 체관(체관)한 것 같은 얼굴로 간혹 웃는 일이 있으나 그것은 좀 처럼 하여서는 없는 일이외다. 대개는 침묵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온순하게 물건을 운반도 하고 사람을 태워 가지고 달아나기도 합니다.
말님, 당신의 운명은 다만 그것뿐입니까. 그러하다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외다. 나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의 악을 볼 때 항상 내세의 심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당신이 운명을 생각할 때 항상 당신도 사람이 될 때가 있고 사람도 당신이 될 때가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 신생활>1922.8
남궁벽 시인 / 별의 아픔
임이시여,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어린 아이가 뒹굴을 때에 감응적으로 깜짝 놀라신 일이 없으십니까.
임이시여,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지상의 꽃을 비틀어 꺾을 때에 천상의 별이 아파한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 신생활>1922.8
남궁벽 시인 / 풀
풀, 여름 풀 요요끼(代代木)들의 이슬에 젖은 너를 지금 내가 맨발로 삽붓삽붓 밟는다. 여인의 입술에 입맞추는 마음으로. 참으로 너는 땅의 입술이 아니냐.
그러나 네가 이것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내가 죽으면 흙이 되마. 그래서 네 뿌리 밑에 가서 너를 복돋아 주마꾸나.
그래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너나 내나 우리는 불사(不死)의 둘레를 돌아다니는 중생이다. 그 영원한 역정(歷程)에서 닥드려 만날 때에 마치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될 때에 지금 내가 너를 삽붓 밟고 있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삽붓 밟아 주려무나.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화 시인 / 오늘밤 아버지는 퍼렁 이불을 덮고 외 1편 (0) | 2019.08.02 |
---|---|
노자영 시인 / 버들피리 외 2편 (0) | 2019.08.02 |
임화 시인 / 어린 태양(太陽)이 말하되 외 1편 (0) | 2019.08.01 |
노자영 시인 / 불 사루자 외 3편 (0) | 2019.08.01 |
김용호 시인 / 가을의 동화(童話) 외 3편 (0) | 2019.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