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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모윤숙 시인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3.

모윤숙 시인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 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 숲을

 

이 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우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

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체 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아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시집<풍랑>1951

 

 


 

 

모윤숙 시인 / 어머니의 기도

 

 

높이 잔물지는 나뭇가지에

어린 새가 엄마 찾아 날아들면,

어머니는 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산 위 조그만 성당 안에 촛불을 켠다.

바람이 성서를 날릴 때

그리로 들리는 병사의 발자국 소리들!

아들은 어느 산맥을 지금 넘나 보다.

쌓인 눈길을 헤엄쳐

폭풍의 채찍을 맞으며

적의 땅에 달리고 있나 보다.

쌓인 눈길을 헤엄쳐

폭풍의 채찍을 맞으며

적의 땅에 달리고 있나 보다.

애달픈 어머니의 뜨거운 눈엔

피 흘리는 아들의 십자가가 보인다.

주여!

이기고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기고 돌아오게 하옵소서.

 

시집<풍랑>1951

 

 


 

 

모윤숙 시인 / 조선의 딸

 

 

이 마음 물결에 고요치 못할 때

믿부신 그의 음성 내 곁으로 날아와

내 영혼의 귓가를 흔들어줍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느냐"고.

 

내가 자리에 피곤히 기대었을 때

소리없이 그의 손은 내 가슴에 찾아와

고달픈 내 혼에 속삭입니다.

"너는 왜 잠들지 못했느냐"고

 

헤어진 치마보고 가난을 슬퍼할 때

어데선지 그 얼굴은 가만히 나타나

께어진 창틈으로 속삭입니다.

"너는 조선의 딸이 아니냐"고.

 

그리운 사람 있어 눈물질 때면

내 어깨 가만히 흔드는 이 있어

자비한 목소리로 들려 줍니다.

"인생의 전부는 사랑이 아니라"고.

 

 


 

 

 모윤숙(毛允淑) 시인 / 1910년-1990년

호는 영운(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선과(選科)를 수료. 그뒤 월간 《삼천리(三千里)》와 중앙방송국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 1937년 장편 산문집 《렌의 애가》를 출간하였다.  8.15광복 뒤에는 문단과 정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 1948년에는 월간문예지《문예》를 발간하는 한편, 1948·1949년에는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장, 1954년 한국펜클럽 부회장,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및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거쳐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1년 8대국회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현대시인협회장(1973), 통일원 고문(1974),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1977), 문학진흥재단 이사장(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받았고, 저서에는 《모윤숙 전집》《논개》《렌의 애가》 등이 있다.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1970), 1979년 3·1문화상을 받았고, 199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