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 시인 / 해곡(海曲)3장
1 임실은 배 아니언만 하늘 가에 돌아가는 흰 돛을 보면 까닭 없이 이 마음 그립습니다.
호올로 바닷가에 가서 장산에 지는 해 바라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밀물이 발을 적시 옵내다.
2 아침이면 해뜨자 바위 위에 굴 캐러 가고요 저녁이면 옅은 물에서 소라도 줍고요.
물결 없는 밤에는 고기잡이 배 타고 달래섬 갔다가 안 물리면 달만 싣고 돌아오지요.
3 그대여 시를 쓰라거든 바다로 오시오. 바다 같은 숨을 쉬라거든.
임이여 사랑을 하랴거든 바다로 오시오. 바다 같은 정열에 잠기랴거든.
양주동 시인 / 조선의 맥박
한밤에 불 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잠잠할 때에, 나는 조선의 힘 없는 맥박을 짚어 보노라. 나는 임의 모세관, 그의 매박이로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훤한 동녘 하늘 밑에서 나의 희망과 용기가 두 팔을 뽐낼 때면, 나는 조선의 소생된 긴 한숨을 듣노라. 나는 임의 기관이요, 그의 숨결이로다.
그러나 보라, 이른 아침 길가에 오가는 튼튼한 젊은이들, 어린 학생들, 그들의 공 던지는 날랜 손발, 책보 낀 여생도의 힘 있는 두 팔 그들의 빛나는 얼굴, 활기 있는 걸음걸이 아아! 이야말로 조선의 맥박이 아닌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갓난아이의 귀여운 두 볼 젖 달라 외치는 그들의 우렁찬 울음, 작으나마 힘찬, 무엇을 잡으려는 그들의 손아귀 해죽해죽 웃는 입술, 기쁨에 넘치는 또렷한 눈동자. 아아! 조선의 대동맥, 조선의 폐는 아기야 너에게만 있도다.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산 넘고 물 건너
산 멈고 물 건너 매 그대를 보려 길 떠났노라.
그대 있는 곳 바닷가라기 내 산길을 토파 멀리 오너라.
그대 있는 곳 바닷가라기 내 물결을 헤치고 멀리 오너라.
아아, 오늘도 잃어진 그대를 찾으려 이름 모를 이 마을에 헤매이노라.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산길
1 산길을 간다. 말 없이 호올로 산길을 간다.
해는 져서 새 소리 그치고 짐승의 발자취 그윽히 들리는
산길을 간다, 말 없이 밤에 호올로 산길을 간다.
2 고요한 밤 어두운 수풀
가도 가도 험한 수풀 별 안보이는 어두운 수풀
산길은 험하다. 산길은 멀다.
3 꿈 같은 산길에 화톳불 하나.
(길없는 산길은 언제나 언제나 끝나리) (캄캄한 밤은 언제나 새리)
바위 위에 화톳불 하나.
양주동 시인 / 영원의 비밀
님은 내게 황금으로 장식한 적은 상자와 상아로 만든 열쇠를 주시면서, 언제든지 내 얼골이 그리웁거든 가장 각갑할 때에 열어보라 하섯더니라.
날마다 날마다 나는 님이 그리울 때마다 황금상을 가슴에 안고 그 우에 입맛초앗스나, 보담 더 각갑할 때가 후일에 잇슬가 하야 맛츰내 열어보지 안엇섯노라.
그러나 엇지 알엇스랴, 먼―먼 후일에 내가 참으로 황금상을 열고 십헛슬 때엔, 아아 그 때엔 임의 상아의 열쇠를 일헛슬 것을.
(황금상―그는 우리 님긔서 날 바라고 가실 때 최후에 주신 영원의 영원의 비밀이러라.)
< 금성>창간호, 1923.11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화 시인 / 헌시(獻詩) 외 2편 (0) | 2019.08.07 |
---|---|
오일도 시인 / 저녁 놀 외 3편 (0) | 2019.08.07 |
임화 시인 / 하늘 외 2편 (0) | 2019.08.06 |
신석초 시인 / 꽃잎 절구 외 1편 (0) | 2019.08.06 |
김형원 시인 / 꿈에 본 사람 외 3편 (0) | 2019.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