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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동엽 시인 / 고향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30.

신동엽 시인 / 고향

 

 

하늘에

흰구름을 보고서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

 

즐겁고저

입술을 나누고

아름다웁고저

화장칠해 보이고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

 

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창작과비평, 1968.  여름호


 


 

 

신동엽 시인 / 그 가을

 

 

  날씨는 머리칼 날리고

  바람은 불었네

  냇둑 전지(戰地)에.

 

  알밤이 익듯

  여울물 여물어

  담배 연긴 들길에

  떠가도.

 

  걷고도 싶었네

  청 하늘 높아가듯

  가슴은 터져

  들 건너 물 마을.

 

  바람은 머리칼 날리고

  추석(秋夕)은 보였네

  호박국 전지에.

 

  버스는 오가도

  콩밭 머리,

  내리는 애인은 없었네.

 

  그날은 빛났네

  휘파람 함께

  수수밭 울어도

  체부(遞夫) 안 오는 마을에.

 

  노래는 떠 갔네. 깊은 들길

  하늘가 사라졌네, 울픈 얼굴

  하늘가 사라졌네

  스무살 전지에.

  조선일보(朝鮮日報), 1960년 10월 17일


 


 

 

신동엽 시인 /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追憶)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 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창작과비평, 1968. 여름

 


 

 

신동엽 시인 /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 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을 일일께며

 

 


 

 

신동엽 시인 / 꽃 대가리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숲 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두드리면

먼 상고까장 울린다

 

춤 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 타작 소리.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삼한ㅅ적

맑은 대가리.

 

산 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

 

 


 

 

신동엽 시인(1930년-1969년)

신동엽(申東曄,)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 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1949년 부여 주변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족청년회 선전부장으로 일하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됐다.

1953년 단국대를 졸업한 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어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 거리에 헌책방을 열었다. 신동엽은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을 만났다. 1957년 인병선과 결혼한 뒤 고향으로 낙향하여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58년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 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 독서와 문학 습작에 몰두하다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