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 고향
하늘에 흰구름을 보고서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
즐겁고저 입술을 나누고 아름다웁고저 화장칠해 보이고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
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창작과비평,
1968. 여름호
신동엽 시인 / 그 가을
날씨는 머리칼 날리고 바람은 불었네 냇둑 전지(戰地)에.
알밤이 익듯 여울물 여물어 담배 연긴 들길에 떠가도.
걷고도 싶었네 청 하늘 높아가듯 가슴은 터져 들 건너 물 마을.
바람은 머리칼 날리고 추석(秋夕)은 보였네 호박국 전지에.
버스는 오가도 콩밭 머리, 내리는 애인은 없었네.
그날은 빛났네 휘파람 함께 수수밭 울어도 체부(遞夫) 안 오는 마을에.
노래는 떠 갔네. 깊은 들길 하늘가 사라졌네, 울픈 얼굴 하늘가 사라졌네 스무살 전지에. 조선일보(朝鮮日報), 1960년 10월 17일
신동엽 시인 /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追憶)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 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창작과비평, 1968. 여름
신동엽 시인 /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 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을 일일께며
신동엽 시인 / 꽃 대가리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숲 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두드리면 먼 상고까장 울린다
춤 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 타작 소리.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삼한ㅅ적 맑은 대가리.
산 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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