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 영(影)
버스에 오르면 흔들리는 재미에 하루를 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먹먹한 가슴 굳어만 갈 뿐 나타나줄 것같은 비가 내리는 어둔 저녁에도 너는 없었다. 대폿집 앞에 서면 부서지고 싶은 대가리 대가리를 흔들면서 전찻길을 건넌다.
댕그랑 땡 미친 가슴처럼 아스팔트 바닥에 쏟아지는 통쾌한 중량의 동전잎 버스에 오르면 울고 싶은 재미에 하루를 산다. 너는 말할 것이다. 돌아가라, 돌아가라고. 그러면서도 너는 내 눈을 지켜보며 떠나지 않는 것이다.
비는 내리는데 숙명처럼 나는 널 생각하고 고뇌의 심연에 빠져 버둥이는 내 눈을 너는 연민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떠나라, 아니면 함께 빠져주든가. 가로수에 잎이 트면 그리고 보리 이랑이 강과 마을을 물들이면 나는 떠나갈 것이다.
신동엽 시인 / 완충지대(緩衝地帶)
하루 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運河) 이켠서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 건지다 보면 밑둥 긴 목포처럼 역사는 철철 흘러가 버린다.
피 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영(嶺) 넘으면 완충지대(緩衝地帶)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森林) 거니노라면 초연(硝煙) 걷힌 밭두덕가 풍장 울려라.
아사녀, 문학사, 1963
신동엽 시인 / 이곳은
삼백 예순 날 날개 돋친 폭탄은 대양 중가운데 쏟아졌지만, 허탕 치고 깃발은 돌아간다. 승리는 아무데고 없다.
후두둑 대지를 두드리는 여우비. 한 무더기의 사람들은 냇가로 몰려갔다. 그들 떠난 자리엔 펄 펄 펄 심장이 흘리워 뛰솟고.
독은 비어 있다. 다투어 배 밖으로 쏟아져 나간 콩나물 역사. 아침 햇살 속 오간 수만 화살. 날아간 물체들의 흐느낌은 정(定)한 문, 지평(地平)의 밖이었다.
그곳엔 무덤이 있다.
바닷가선 비묻은 구름 용(龍)을 싣고 찬란하게 찌들어오리니 급기야 홍수는 오고, 구렝이, 모자, 톱니 쏠린 공장 헤엄쳐 나가면 조상(弔喪)도 없이 옛 마을터엔 훵훵 오갈 헛바람. 쓸쓸하여도 이곳은 점령하라. 바위 그늘 밑, 맨 마음채 여문 코스모스씨 한톨. 억만년 퍼붓는 허공(虛空)밭에서
턱 가래 안창엔 심그라. 사람은 비어 있다. 대지는 한가한 빈 집을 지키고 있다.
현대문학(現代文學), 1962. 8
신동엽 시인 / 이리 와 보세요
이리 와 보세요 당신 눈에 살색(殺色)이 도는군요.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엔 우둔이 당신 입엔 시의(猜疑)가 오랜 대(代)를 뿌리박고 있군요.
또, 와 보세요 당신은 교만한 종자야요 또, 당신은 피가 병균으로 차 있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눈이 순정과 지혜로 맑게 빛나고 너그럽고 슬기로운 토양에서 자란 맘과 몸이 착실한 사내의 씨.
그리고, 마음과 힘을 쏟아 정성껏 나의 몸에 씨를 심거줄 사내.
신동엽 시인 / 조국(祖國)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신록 피는 오월 서부사람들의 은행(銀行)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거리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굿한 설악(雪嶽)처럼 하늘을 보며 누워 있지 않은가.
무더운 여름 불쌍한 원주민에게 총쏘러 간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간이역 신문을 들추며 비통(悲痛)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 이방인들이 대포 끌고 와 강산의 이마 금그어 놓았을 때도 그 벽(壁) 핑계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꽃 피는 남북평야에서 주림 참으며 말없이 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
조국아 한번도 우리는 우리의 심장 남의 발톱에 주어본 적 없었나니 슬기로운 심장이여, 돌 속 흐르는 맑은 강물이여. 한번도 우리는 저 높은 탑 위 왕래하는 아우성 소리에 휩쓸려본 적 없었나니.
껍질은, 껍질끼리 싸우다 저희끼리 춤추며 흘러간다.
비 오는 오후 뻐스 속서 마주쳤던 서러운 눈동자여, 우리들의 가슴 깊은 자리 흐르고 있는 맑은 강물, 조국이여. 돌 속의 하늘이여. 우리는 역사의 그늘 소리없이 뜨개질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나니.
조국아, 강산의 돌 속 쪼개고 흐르는 깊은 강물, 조국아. 우리는 임진강변에서도 기다리고 있나니, 말없이 총기로 더럽혀진 땅을 빨래질하며 샘물 같은 동방의 눈빛을 키우고 있나니.
월간문학(月刊文學), 196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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