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 시인 / 석양구(夕陽丘)
바람소리는 아니고 실낱같은 소리가 있어 푸른 잎사귀 너머로 나직하게 나직하게 들리도다.
멀리서 부르는 꿈 노랜지 야릇한 소리는 끊임없이 고운 향기에 녹아들어 쓸쓸한 이 가슴에 사무치어라.
가을에 속삭이는 물결같이 풋어린 설움이 흔드는 대로 나도 몰래 들가의 지름길은 보리 심은 언덕으로 오르나니
보아라, 새까만 큰 바위 사이에 높이 받들은 성(聖) 마리아, 새맑은 모래 위에 꿇앉으며 우러르고 구부린 수녀(修女)들을
두 팔을 가슴 위에 맞대이고 끝없이 기리는 독경(讀經)의 소리 혹(惑)시 떨리고 혹(惑)시 그윽하여 수녀(修女)들은 성상(聖像)밑에 깃들이도다.
오, 신앙(信仰)의 기쁨이여 넘치는 영광(榮光)에 젖은 수녀(修女)들의 소리여 나의 고달픈 령(靈), 거칠은 몸은 무거운 묵시(默示)에 느껴울다.
어느덧 늦은 바람은 한숨짓고 빗발같은 사양(斜陽)을 가로받은 교당(敎堂)의 붉은 벽돌, 둥그런 유리창(琉璃窓)은 갸륵한 금(金)빛에 빛나여라.
아, 지금 수녀(修女)들의 고운 소리는 동산 넘어 깊이도 사라지고 물같이 갈앚은 모래언덕은 속 아픈 명상(瞑想)에 저물어 간다.
이장희 시인 / 비오는 날
쓸쓸한 정서(情緖)는 커어튼을 잡아 늘이며 窓 너머 빗소리를 듣고 있더니 불현듯 도깨비의 걸음걸이로 몽롱한 우경(雨景)에 비틀거리며 뜰에 핀 선홍(鮮紅)의 진달래꽃을 함부로 뜯어 입에 물고 다시 머 ─ㄴ 버드나무를 안고 돌아라
이장희 시인 / 달밤 모래 위에서
갈대 그림자 고요히 흩어진 물가의 모래를 사박 사박 사박 거닐다가 나는 보았습니다 아아 모래 위에 자빠진 청개구리의 불룩하고 하이얀 배를 그와 함께 나는 맡았습니다 야릇하고 은은한 죽음의 비린내를 슬퍼하는 이마는 하늘을 우러르고 푸른 달의 속삭임을 들으려는 듯 나는 모래 위에 말없이 섰더이다
이장희 시인 / 겨울밤
눈비는 개였으나 흰 바람은 보이듯 하고 싸늘한 등불은 거리에 흘러 거리는 푸르른 유리창(琉璃窓) 검은 예각(銳角)이 미끄러 간다.
고드름 매달린 저기 저 처마 끝에 서울의 망령(亡靈)이 떨고 있다 풍지같이 떨고 있다.
- [생장] 5호, 19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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