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김춘수 시인 / 갈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5.

김춘수 시인 / 갈대

 

 

1

 

너는 슬픔의 따님인가 부다.

 

너의 두 눈은 눈물에 어리어 너의 시야(視野)는 흐리고 어둡다.

 

너는 맹목(盲目)이다. 면(免)할 수 없는 이 영겁(永劫)의 박모(薄暮)를 전후좌우(前後左右)로 몸을 흔들어 천치(天痴)처럼 울고 섰는 너.

 

고개 다수굿이 오직 느낄 수 있는 것, 저 가슴에 파고드는 바람과 바다의 흐느낌이 있을 뿐

 

느낀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 다른 눈.

눈물겨운 일이다.

 

2

 

어둡고 답답한 혼돈(混沌)을 열고 네가 탄생(誕生)하던 처음인 그날 우러러 한 눈은 하늘의 무한(無限)을 느끼고 굽어 한 눈은 끝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를 보았다.


른 하늘의 무한(無限).

헤아릴 수 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

 

그때부터였다. 하늘과 땅의 영원(永遠)히 잇닿을 수 없는 상극(相剋)의 그 들판에서 조그만 바람에도 전후좌우(前後左右)로 흔들리는 운명(運命)을 너는 지녔다.

 

황홀(恍惚)히 즐거운 창공(蒼空)에의 비상(飛翔).

끝없는 낭비(浪費)의 대지(大地)에의 못 박힘.

그러한 위치(位置)에서 면(免)할 수 없는 너는 하나의 자세(姿勢)를 가졌다.

오! 자세(姿勢)―기도(祈禱).

 

우리에게 영원(永遠)한 것은 오직 이 것뿐이다.


기(旗), 문예사, 1951

 

 


 

 

김춘수 시인 / 늪  2

 

 

늪을 지키고 섰는

저 수양버들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금쟁이 같은 것 물장군 같은 것

거머리 같은 것

개밥 순채 물달개비 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슬픈 이야기가 있다.

 

산도 운다는

푸른 달밤이면

나는

그들의 슬픈 혼령(魂靈)을 본다.

 

갈대가 가늘게 몸을 흔들고

온 늪이 소리없이 흐느끼는 것을

나는 본다.


늪, 문예사, 1950

 

 


 

 

김춘수 시인 / 경(瓊)이에게

 

 

경이는 울고 있었다.

풀덤불 속으로

노란 꽃송이가 갸우뚱 내다보고 있었다.

 

그 것뿐이다.

나는

경이가 누군지를 기억지 못한다.

 

구름이 일다  구름이 절로 사라지듯이

경이는 가버렸다.

 

바람이 가지 끝에

울며 도는데

나는

경이가 누군지를 기억지 못한다.

 

경이,

너는 울고 있었다

풀덤불 속으로

노란 꽃송이가 갸우뚱 내다보고 있었다.


구름과 장미(薔薇), 행문사, 1948

 

 


 

김춘수 시인(金春洙 1922년-2004년)

 

아명은 대여(大.餘). 1922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충무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교 예술학부에서 공부했으나, 1942년에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판하여 1943년에 퇴학당했다. 1946년에 귀국하여 1951년까지 통영중학교, 마산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1946년에 시 <애가>를 발표하면서 등단, 이 때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1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교단에 들어선 그는 1964년부터 1978년까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영남대학교의 문리대 학장을 지내다가 1981년에 정계로 들어오며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시인과 평론가로서 활동한다. 1948년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 출간을 시작으로 시 <산악(山嶽)>, <사(蛇)>, <기(旗)>, <모나리자에게>,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을 발표하였다. 다른 시집으로는 <늪>,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타령조 기타>, <처용(處容)>, <남천>, <비에 젖은 달> 등이 있다. 1958년에 한국시인협회상, 1959년에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