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시인 /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
꿈에 네가 왔더라 스물세 살 때 훌쩍 떠난 네가 마흔일곱 살 나그네 되어 네가 왔더라 살아 생전에 만나라도 보았으면 허구한 날 근심만 하던 네가 왔더라 너는 울기만 하더라 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 한마디 말도 없이 어린애처럼 그저 울기만 하더라 목놓아 울기만 하더라 네가 어쩌면 그처럼 여위었느냐 멀고먼 날들을 죽지 않고 살아서 네가 날 찾아 정말 왔더라 너는 내게 말하더라 다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눈물어린 두 눈이 그렇게 말하더라 말하더라.
죽음속의 영웅, 근역서재, 1977
김규동 시인 / 분단(分斷)
이슬에 젖은 거울을 숨기고 두 개의 몸짓을 본다 이처럼 다른 두 얼굴이 나타내는 것 어둠의 끝이다 운명의 끝이다 우리 서로 쳐다본 채로 죽는 죽음의 빛이다 상승과 낙하가 하나가 되는 종말의 빛이다 페허에 막이 내리면 뿔이 달린 현실은 캄캄한 심장을 흔들어 놓는데.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김규동 시인 / 불안(不安)의 속도(速度)
철(凸)렌즈를 쓰고 내가 거리를 간다.
활자(活字)처럼 다가와 나의 이마에 나의 가슴에 나의 관절(關節)에 나의 동자(瞳子)안에 정면충돌(正面衝突)하는 중량(重量). 중량(重量). 중량(重量).
'절망(絶望)과 공포(恐怖) 아 끝없는 객혈(喀血)이리오'
만나면 모두 세균학자(細菌學者)처럼 싸늘한 체온(體溫)을 내 손의 표피(表皮) 위에 남겨 놓던 선수(選手)들을 차라리 피하면서 피하면서 가야 하는 철(凸)렌즈의 운명(運命) 속에 오늘도 태양(太陽)과 하늘만이 해골(骸骨)처럼 해골(骸骨)처럼 그렇게 남아 갔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송년(送年)
기러기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직 가고 있는지 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을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별빛은 흘러 강이 되고 눈물이 되는데 날개는 밤을 견딜 만한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꿈들은 정다운 추억 속에만 남아 불러보는 노래도 우리 것이 아닌데 시간은 우리 곁을 떠난다 누구들일까 가고 오는 저 그림자는 과연 누구들일까 사랑한다는 약속인 것같이 믿어달라는 하소연과도 같이 짓궂은 바람이 도시의 벽에 매어달리는데 휘적거리는 빈손 저으며 이 해가 저무는데 형제들은 무사히 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쓸쓸한 가슴들은 아직도 가고 있는지 허전한 길에 씁쓸한 뉘우침은 남아 안타까운 목마름의 불빛은 남아 스산하여라 화려하여라.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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