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 나목(裸木)과 시(詩)
1
시(詩)를 잉태(孕胎)한 언어(言語)는 피었다 지는 꽃들의 뜻을 든든한 대지(大地)처럼 제 품에 그대로 안을 수가 있을까, 시(詩)를 잉태(孕胎)한 언어(言語)는 겨울의 설레이는 가지 끝에 설레이며 있는 것이 아닐까, 일진(一陣)의 바람에도 민감(敏感)한 촉수(觸手)를 눈 없고 귀 없는 무변(無邊)으로 뻗으며 설레이는 가지 끝에 설레이며 있는 것이 아닐까,
2
이름도 없이 나를 여기다 보내 놓고 나에게 언어(言語)를 주신 모국어(母國語)로 불러도 싸늘한 어감(語感)의 하느님, 제일 위험(危險)한 곳 이 설레이는 가지 위에 나는 있습니다. 무슨 층계(層階)의 여기는 상(上)의 끝입니까,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발뿌리가 떨리는 것입니다. 모국어(母國語)로 불러도 싸늘한 어감(語感)의 하느님, 안정(安定)이라는 말이 가지는 그 미묘(微妙)하게 설레이는 의미(意味) 말고는 나에게 안정(安定)은 없는 것입니까,
3
엷은 햇살의 외로운 가지 끝에 언어(言語)는 제만 혼자 남았다. 언어(言語)는 제 손바닥에 많은 것들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김춘수 시인 / 돌
돌이여, 그 캄캄한 어둠 속에 나를 잉태(孕胎)한 나의 어머니, 태어나올 나의 눈망울 나의 머리카락은 모두 당신의 오랜 꿈의 비밀(秘密)입니다. 아직은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무겁게 겹도록 달이 차서 소리하면 당신의 일어설 그때까지 당신의 가장 눈부신 어둠 속에 나의 이름은 감추어 두십시오. 그 한번도 보지 못한 나를 위하여 어둠 속에 사라진 무수한 나…… 돌이여, 꿈꾸는 돌이여,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김춘수 시인 / 타령조(打令調) 1
사랑이여, 너는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새벽녘에사 그리운 그이의 겨우 콧잔등이나 입 언저리를 발견(發見)하고 먼동이 틀 때까지 눈이 밝아 오다가 눈이 밝아 오다가, 이른 아침에 파이프나 입에 물고 어슬렁어슬렁 집을 나간 그이가 밤, 자정(子正)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먼동이 틀 때까지 사랑이여, 너는 얼마만큼 달아서 병(病)이 되는가, 병(病)이 되며는 무당(巫堂)을 불러다 굿을 하는가, 넋이야 넋이로다 넋반에 담고 타고동동(打鼓冬冬) 타고동동(打鼓冬冬) 구슬채찍 휘두르며 역귀신(役鬼神)하는가, 아니면, 모가지에 칼을 쓴 춘향(春香)이처럼 머리칼 열 발이나 풀어뜨리고 저승의 산하(山河)나 바라보는가, 사랑이여, 너는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남천, 1977
김춘수 시인 / 집 1
1,
무엇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아버지는 나이 들수록 더욱 소나무처럼 정정히 혼자서만 무성(茂盛)해 가고, 그 절대(絶對)한 그늘 밑에서 어머니의 야윈 가슴은 더욱 곤충(昆蟲)의 날개처럼 엷어만 갔다.
2,
모란이 지고 나면 작약(芍藥)이 피고, 작약(芍藥) 이울 무렵이면 낮에는 아니 핀다던 파아란 처녀꽃을 볼 수 있었다. 그 신록(新綠)이 푸른 잎을 펴어 놓은 마당가에서 나는 어머니를 닮아 가슴이 엷은 소년(少年)이 되어 갔다.
3,
아버지는 장가 간 지 다섯해 만에 나를 낳았다. 나는 할머니의 귀여운 첫손주였다. 스물 난 새파란 소년과수로 춘향(春香)이의 정절(貞節)을 고스란히 지켜온 할머니는 나의 마음까지도 약(弱)하고 가늘게만 기루워 주셨다.
4,
그 집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속에는 언제 보아도 곱게 개인 계절(季節)의 하늘이 떨어져 있었다. 언덕에 탱자꽃이 하아얗게 피어 있던 어느 날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그리움을 배웠다.
나에게는 왜 누님이 없는가? 그것은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내가 다 크도록까지 내 혼자의 속에서만 간직해온 나의 단 하나의 아쉬움이었다.
5,
무엇이 귀한 것인가도 모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한사코 어딘지 달아나고 싶은 반역(反逆)에로 시뻘겋게 충혈(充血)한 곱지 못한 눈매를 가진, 나는 차차 청년(靑年)이 되어갔다.
기(旗), 문예사,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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