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시인 / 시인(詩人)의 검(劍)
합리적인 것은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은 합리적이다 ―헤겔
꽃을 흔들고 날아가는 새의 날음을 보기 위해 눈을 감을 것은 없다 오늘 살면 내일 살 일이 태산 같은 삶을 심장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어둠의 불빛 아래를 헤매일 것은 없다 괭이를 잡은 손과 펜을 쥔 손의 다름을 알기 위해 공해에 찌든 들판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은 없다 시인의 검은 치욕의 검이거니 가장 합리적인 웃음과 눈짓을 거부하고 자유를 가두는 운동을 미워하며 체제를 또한 믿지 않으리라 날개가 아니며 형태가 아니며 관념이 아니리니 숨쉬는 자유와 만나는 자유를 백두산에서 한라산 끝까지 하나 되어 솟구칠 통일의 강을 노래하리라 피 흐르는 화목을 이뤄가리라 시인의 검은 묶인 것을 자르는 바람결이거니 화살보다 빠른 뇌성이거니 육중한 것 기름진 것을 모조리 불태우며 억압을 푸는 날랜 손이리라 난초잎에 비낀 달빛이 아니어라 가슴 깊이 파헤쳐진 국토에 시멘트에 묻혀 잠드는 철근더미를 한맺힌 늑골이라 생각하자 조직이요 벽이라 느끼자 어둠이 짙으면 귀신 같은 흰 빛이 다가오리 죽은 자의 혼도 일어서는 나날의 놀라움으로 어떤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오늘의 암흑을 노래하자.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김규동 시인 / 아침의 예의
40년 동안 시를 생각하며 살았다지만 고향 돌아갈 때 갖고 갈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홀가분한 것이 오히려 눈물겹다 그렇구나 그 아침이 오면 빈손으로 만나야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자랑할 것도 없이 자나깨나 그리던 그리움 하나만으로 만나야 한다 만남과 화합 영원한 해방의 날에 하나가 되는 통일말고 우리가 원했던 것이 또 무엇이더냐 한 많은 마음을 비우고 손을 깨끗이 씻자 그것만이 우리들의 만남을 위한 참 예절이거니.
오늘밤 기러기떼는, 동광출판사, 1989
김규동 시인 / 안부
알려다오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만이라도 분계선이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한다면 땅 속 깊이 바닷 속 깊이 잠겨서라도 소리쳐다오 죽어서라도 외쳐다오 혼백끼리라도 만나서 이 원한 풀어보자고 너 혼자 낫게 살려 하지 마라 낫게 살려면 거짓말해야 하는구나 거짓말로 논문이 되겠느냐 시가 되겠느냐 끊어진 형제의 마음 이어지겠느냐 말을 많이 하지 마라 고상한 말보다는 앓음 소리가 더 확고한 말이구나 말로 통일이 되겠느냐 하늘은 멀고 땅은 어두우니 스산한 까마귀야 펄럭이는 독나비야 나는 믿고 싶다 온 세상 그 무엇보다도 뛰고 있는 이 심장의 고동소리를.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김규동 시인 / 어린 손자에게
얘야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저건 잘못된 충무공이시다 장군님은 저렇게 무섭게 생긴 누굴 위협하는 분 아닐 거야 인자하고 따뜻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힘을 빌리는 자상하고 용기 있는 분일 게다 그러기에 민중의 처참 보다못해 나라를 구하고 스스로 나아가 화살 받으신 분 개선장군 소리 듣기를 죽음으로 사양한 분 배고픈 이에게 밥 주고 팔다리 다친 병사의 아픔 함께 운 인정 넘치신 분 장군님은 지금 여기 계시지 않아 자동차 악쓰며 쫓겨 달리는 이 넓은 길엔 계시지 않아 장군님은 남루한 옷 걸치고 팔도강산 외진 마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농민들 일손 도와주고 노동자들이 신음하는 공장과 일터를 고루 돌며 형제들 손 잡아주고 있지 몸에 기름 끼얹고 한 몸 불태운 이 땅 젊은이들 영혼 붙들고 통곡하고 계셔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아 통일로 가는 이 싸움 속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등뼈 휘도록 일하고 계셔 커다란 칼 짚고 이 민중 내려다보며 호령하는 위엄 가운데는 계시지 않아 얘야 이건 눈물 많으신 이순신 장군님 아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낮이나 밤이나 버티고 섰는 이분은 장군님과는 물론 우리 모두와 무관한 차고 음산한 쇠기둥이다.
오늘밤 기러기떼는, 동광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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