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기차(汽車)
레일을 쫓아가는 기차는 풍경에 대하여도 파랑빛의 로맨티시즘에 대하여도 지극히 냉담하도록 가르쳤나 보다. 그의 끝없는 여수를 감추기 위하여 그는 그 붉은 정열의 가마 위에 검은 강철의 조끼를 입는다. 내가 식당의 메뉴 뒷등에 (나로 하여금 저 바닷가에서 죽음과 납세와 초대장과 그 수없는 결혼식 청첩과 부고들을 잊어버리고 저 섬들과 바위의 틈에 섞여서 물결의 사랑을 받게 하여주옵소서) 하고 시를 쓰면 기관차란 놈은 그 툰탁한 검은 갑옷 밑에서 커―다란 웃음소리로써 그것을 지워버린다. 나는 그만 화가 나서 나도 그놈처럼 검은 조끼를 입을까 보다 하고 생각해 본다.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깃발
파랑 모자(帽子)를 기울여 쓴 불란서영사관(佛蘭西領事館) 꼭대기에서는 삼각형(三角形)의 깃발이 붉은 금(金)붕어처럼 꼬리를 떤다.
지중해(地中海)에서 인도양(印度洋)에서 태평양(太平洋)에서 모―든 바다에서 육지(陸地)에서 펄 펄 펄 깃발은 바로 항해(航海)의 일초 전(一秒前)을 보인다.
깃발 속에서는 내일(來日)의 얼굴이 웃는다. 내일(來日)의 웃음 속에서는 해초(海草)의 옷을 입은 나의 `희망(希望)'이 잔다.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김기림 시인 / 데모크라시에 부치는 노래
나라를 판 것은 언제고 백성이 아니라 벼슬아치요 세도(勢道)댁이었다
사천년(四千年) 오랜 세월을 두고 이겨 본 일이 없는 백성이다. 떳떳이 말해 본 적이 없어 참고 견디기에 소처럼 목만 부었다
지금 백성은 무언가 말하고 싶다 백성의 입을 막아서는 아니 된다 백성의 소리는 구수하고 진심(眞心)이 들어 좋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하늘과 태양을 가리지 말아라 삼한(三韓) 신라(新羅) 적부터도 남의 것 아닌 본시 이 나라 백성의 별이요 하늘이 아니냐
인제사 그들의 역사가 시작하려는 것이다 이번은 백성들이 이겨야 하겠다 백성을 이기게 해야 하겠다
새노래, 아문각, 1948
김기림 시인 / 동해(東海)
울룩 불룩 기운찬 검은 산맥(山脈)이 팔을 벌려 한아름 둥근 바다를 안아 들인 곳. 섬들은 햇볕에 검은 등을 쪼이고 있고 고깃배들은 돛을 걷우고 푸른 침상(寢牀)에서 항해(航海)를 잊어버리고 조을고 있구료.
부디 달리는 기차(汽車)여 숨소리를 죽이려므나. 조는 바위를 건드리는 수줍은 흰 물결이 놀라서 달아나면 어떻거니?
멱을 따는 아가씨 제발 이 맑은 물에 손을 적시지 말아요. 행여나 어린 소라들이 코를 찡기고 모래를 파고 숨어버릴까 보오.
오늘밤은 차(車)에서 내려 저 숲에 숨어서 별들이 내려와서 목욕하는 것을 가만히 도적해 볼까.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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