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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규동 시인 / 어머님전(前) 상서(上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7.

김규동 시인 / 어머님전(前) 상서(上書)

 

 

솔개 한 마리

나즈막히 상공을 돌거든

어린날의 모습같이

그가 지금

조그맣게 어딘가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움직이는 그림자는

영원에 가려

돌아오지 않지만

달빛에 묻어서라도

그 목소리는 돌아오는 것이라

여겨주세요

 

이제 생각하면

운명이라고 잊혀도 지건만

겨레의 허리에 감긴 사슬

너무나 무거우니

아직도 우리들은

조그맣게 조그맣게

걸어가고만 있나 봐요

 

아무리 애써도 닿지 못하는

서투른 이 발걸음

죽은 자와 더불어 헤매어 봅니다

 

솔개 한 마리

빈 하늘을 돌거든

차가운 흙 속에서라도

어여삐 웃어주세요.

 

죽음속의 영웅, 근역서재, 1977

 

 


 

 

김규동 시인 / 여름의 노래

 

 

덥다 책을 치우고

백두산 천지 사진을 건다

가긴 어딜 가

이마빡이 시리면 된다

백두산에서 일박하고

무산령을 넘는데

곰 한 마리 길을 막는다

하늘이 보이질 않는 자작나무 숲에서

산삼만 캐먹은 큰 곰이구나

일행 중의 이야기꾼 갓바치 씨가

비스듬히 꽂히는 석양 빛살을

손등으로 가리고

천지개벽 통일주문을 외니

짐승은 꾸벅 절하고 달아났다

영특한 놈이다

내일은 묘향산에서 자게 된다

기암절벽에 감긴

흰 구름덩이도 만져질까

여름옷 걸친 채로

덜덜 떨며 깊은 산 정기를 마실 것이다

여기를 떠나면

금강산

소백산맥 가로질러

다음날은 지리산이구나

한라산이구나

아 길은 머나

신들린 발걸음이 하염없을 뿐.

 

오늘밤 기러기떼는, 동광출판사, 1989

 

 


 

 

김규동 시인 / 열차(列車)를 기다려서

 

 

비 오는 어두움이 가슴에 아퍼

그럴 때마다 허망한 거리를 가며

당신의 모습을 찾습니다.

 

탄환에 쫓긴 사슴 모양

생활의 막다른 골목에서

불현듯이 그대 손길을 더듬어 봅니다.

 

북에 갔던 항공기의 편대들이

푸른 공간위에 폭음을 굴릴 적마다

그대 모습을 어루만집니다.

 

다섯해의 세월이 지나갔어도

꿈에 뵙는 당신의 그림자는

항시 환히 밝어……

 

육십오세의 흰머리 날리시며

어머니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지금은 큰 우뢰 산하를 진동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인민의 눈동자

별빛처럼 타는 밤―

 

삶을 위한 싸움 속에

자유를 위한 신음 속에

우리 모두 대열져 섰거늘!

 

이윽고 목메인 평화의 아침이 열리면

그 무슨 주저도 없이 달려갈

아들들의 열차를 기다려

 

어머니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돌아가셔선 안됩니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위기(危機)를 담은 전차(電車)

 

 

살아 남았다는

기적(奇蹟)과 기적(奇蹟)의 틈바구니에서

창백한 문명(文明)의 위기(危機)에

서글픈 진단서(診斷書)를 쓴

'D.H.로―렌스'의 얼굴을 닮아가며

오늘로 살벌(殺伐)한 전지(戰地)의 흙을 밟고

귀가(歸家)의 전차(電車)에 오른다.

 

신문(新聞)을 펼쳐든 사람과

갈수록 괴로워지는 현실(現實) 때문에

말이 없는 청년(靑年)과

숱한 피곤(疲困)한 얼굴을 붙안은 사람들의 그림자

 

모두가 제각기

붙잡히지 않는 행복(幸福)을 서글피 여기며

밤의 어둠속을 굴러가고 있을 때,

안전(眼前)에 어른거리는

내 가난한 가족(家族)들의 헐벗은 정경(情景)이

황폐한 지평(地平)에 쓸쓸하구나.

 

학문(學問)과 직업(職業)과 생활(生活).

또는 애정(愛情)과 죽음.

그 모든 세상의 위기(危機)를 한 몸에 지니고

그 속에서 오히려 살아 나갈 수 있는 가장 좁은 길을 찾는……

피에 젖은 정신(精神)의 쇠잔(衰殘)한 흐느낌이여

 

죽는다는 것―

그것은 언제 어디서라도

기꺼운 웃음 머금고 행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휴매니티'일 것이나

그것은 또한 얼마나

건강(健康)한 체격(體格)을 요(要)하는 사상(思想)일 것인가.

 

나는 왜 '나'일 수가 없는 것일까?

그렇다고 좀더 안온(安溫)한 시대(時代)에 살았던

어린 정신(精神)의 귀족(貴族)인 '부루스트'처럼

흘러간 시대(時代)의 회상(回想)에 목메어 울 수도 없어

이 밤은

차창(車窓)에 불어드는 훈훈한 바람이

오히려 이마에 차다.

 

현대의 신화, 위성문화사, 1958

 

 


 

김규동 시인(金奎東 1925~2011)

호는 문곡(文谷). 1925년 2월 13일 함북 경성 출생. 경성고보를 거쳐 1946년 연변의대를 수료했고 평양종합대학을 중퇴했다. 경성고보시절 스승 김기림(金起林)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시 「강」이 당선되어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며, 1951년 박인환(朴寅煥)‧김경린(金璟麟) 등과 함께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했다.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는 살리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포대가 있는 풍경」이 각각 당선되기도 했다.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했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역임한 바 있다. 그의 시작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나비와 광장』(1955), 『현대의 신화』(1958) 등을 발간했던 1960년 초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포대가 있는 풍경」, 「어느 병상의 연대」 등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쟁 관련 소재,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의식, 현실의 비판적 추구 등의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많이 발표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시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으로 활동한 것은 그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이 시기의 시적 경향은 시집 『죽음 속의 영웅』(1977), 『깨끗한 희망』(1985), 『오늘 밤 기러기떼는』(1989)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시는 통일문제, 노사문제, 학생시위 등 현실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거니와, 이는 현실의 문제에 능동적인 참여와 실천을 강조한 사회파 모더니즘으로의 적극적인 변모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시집으로는 『나비와 광장』(1955), 『현대의 신화』(1958), 『죽음 속의 영웅』(1977), 『깨끗한 희망』(1985), 『오늘 밤 기러기떼는』(1989), 『느릅나무에게』(2005) 등이 있고, 시선집 『생명의 노래』(1991), 『길은 멀어도』(1991), 『흰각시 붓꽃』(1993) 등이 있다. 2011년 시인의 시 432편을 모은 『김규동 시전집』이 창비사에서 발간되었다. 시작 이외에 평론활동도 꾸준히 계속하여 『새로운 시론』(1959), 『지성과 고독의 문학』(1962),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1979) 등의 평론집을 내기도 했으며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2011)이 있다. 1960년에 자유문인회협상, 2006년 만해문학상, 201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99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1년 9월 28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