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 무구(無垢)한 그들의 죽음과 나의 고독(孤獨)
1
스스로도 모르는 어떤 그날에 죄(罪)는 지었습니까?
우러러도 우러러도 보이지 않는 치솟은 그 절정(絶頂)에서 누가 그들을 던졌습니까?
그 때부텁니다 무수한 아픔들이 커다란 하나의 아픔이 되어 번져간 것은―
2
어찌 아픔은 견딜 수 있습니까?
어찌 치욕(恥辱)은 견딜 수 있습니까?
죄(罪)지은 기억(記憶)없는 무구(無垢)한 손들이 스스로의 손바닥에 하나의 장엄(莊嚴)한 우주(宇宙)를 세웠습니다 .
3
그러나 꽃들은 괴로웠습니다 .
그 우주(宇宙)의 질서(秩序) 속에서 모든 것은 동결(凍結)되어 죽어갔습니다 .
4
죽어가는 그들의 눈이 나를 우러러보았을 때는
내가 그들에게 나의 옷과 밥과 잠자리를 바친 뒤였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의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린 뒤였습니다.
5
그러나 그들의 몸짓과 그들의 음성과 그들의 모든 무구(無垢)의 거짓이 떠난 다음의 나의 외로움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수정(水晶)알처럼 투명(透明)한 순수(純粹)해진 나에게의 공포(恐怖)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
내가 죽어가는 그들을 위하여 무수한 우주(宇宙) 곁에 또 하나의 우주(宇宙)를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인(隣人), 문예사, 1953
김춘수 시인 / 먼 들메나무
슬픔은 슬픔이란 말에 씌워 숨차다. 슬픔은 언제 마음 놓고 슬픔이 되나. 해가 지고 더딘 밤이 오면 간혹 슬픔은 별이 된다. 그새 허파의 바람도 빼고 귀도 씻으며 슬쩍슬쩍 몰래 늙어간 산모퉁이 키 머쓱한 그 나무
김춘수 시인 / 꽃의 소묘(素描)
1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香氣)며 화분(花粉)이며……나비며 나비며 축제(祝祭)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追憶)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追憶)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2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微笑)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純金)의 천(阡)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3
네 미소(微笑)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侵犯)할 수는 없다.
금술 은술을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七寶花冠)을 쓰고 그 아가씨도 신부(新婦)가 되어 울며 떠났다.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간(肝)을 쪼아 먹는다.
4
너의 미소(微笑)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멀고 먼 곳에서 너는 빛깔이 되고 향기(香氣)가 된다. 나의 추억(追憶)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너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
꽃의 소묘(素描), 벡자사, 1959
김춘수 시인 / 비상(飛翔)
새가 날아간 흔적은 없다 새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새를 날려보내고 하늘은 멍청해진다 누가 보았다고 하는가 새발톱에 맺힌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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