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바다
바다 너는 벙어리처럼 점잖기도 하다. 소낙비가 당황히 구르고 지나갈 적에도 너는 놀라서 서두르는 일이 없다.
사공(沙工)들은 산(山)처럼 큰 그들의 설움을랑 네 뼈ㄷ합 속에 담아 두려하여 해만(海灣)을 열고 바삐 나가더라.
사람들은 너를 운명(運命)이라 부른다. 너를 울고 욕하고 꾸짖는다.
허나 너는 그러한 것들의 쓰레받기인 것처럼 한숨도 눈물도 욕설(辱說)도 말없이 받아 가지고 돌아서더라.
너는 그처럼 슬픔에 익숙하냐.
바다 지금 너는 잠이 들었나 보다. 꿈을 꾸나 보다. 배에 힘을 주나 보다 꿈틀거린다. 너는 자꾸만 하늘을 담고저 애쓰나 보다.
그러나 네 마음은 아직 엉크러지지 않았다. 굳지 않았다. 그러기에 달밤에는 숨이 차서 헐떡인다. 시악씨처럼 햇빛이 부끄러워 섬 그늘에 숨는다.
바다 네 살결은 하늘을 닮아서도 하늘보다 푸르고나. 바위에 베이어 쪼개지는 네 살덩이는 그러나 희기가 눈이고나. 너는 옥(玉) 같은 마음을 푸른 가죽에 쌌고나.
바다 너는 노래 듣기를 퍽으나 좋아하드라 기적(汽笛)만 울어도 너는 쭝기고 귀를 기울이더라. 너는 서투른 목청을 보고도 자꾸만 노래를 부르라 조르더라.
바다 너는 아무도 거둬 본 일이 없는 보료 때때로 바람이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다도 말고 밤이면 별들이 떨어지나 어느새 아침 안개가 훔쳐 버린다.
바다 너는 언제 나더러 친(親)하다고 한 일이 없건만 온 아침에도 잠옷채로 창으로 달려가서 넋없이 또 네 얼굴을 굽어본다.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바다의 향수(鄕愁)
1
날마다 푸른 바다 대신에 꾸겨진 구름을 바라보러 엘레베이터―로 5층 꼭대기를 올라간다……
2
파랑 파라숄을 쓴 기선회사(汽船會社)의 깃발과 파랑. `파라숄'을 쓴 `아라사'의 아기씨들이 옥색의 손수건을 흔드는 부두의 거리에서는 바다는 해관(海關)의 지붕보다도 높은 곳에 있었다. 기―ㄴ `세멘트'의 축대를 돌아가면 갑자기 머리 위에서 물결의 지저귐이 시끄러웠다. 고집은 조각지들이 아직도 밤을 깨물고 놓지 않는 모랫물에는 까치들이 모여 와서 아무도 모르는 조국(祖國)의 옛 방언(方言)을 지껄이고 남빛 목도리를 두른 섬들 사이를 호고 흰 선수(選手)의 복장을 입은 증기선들이 다다다다다다다다 바다의 등을 황용 기어올라갔다……
3
오늘도 푸른 바다 대신에 꾸겨진 구름을 바라보러 엘레베이터로 5층 꼭대기를 올라간다 거기서 우리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머―ㄹ리 고향(故鄕)을 떠나 있는 것처럼 서투른 손짓으로 인사를 바꾸고 그러고는 바닷가인 것처럼 소매를 훨씬 걷어 올리고 난간에 기대서서 동그랗게 담배 연기를 뿜어 올린다.
조선일보, 1935. 6. 24
김기림 시인 / 방(房)
땅 위에 남은 빛의 최후의 한 줄기조차 삼켜 버리려는 검은 의지(意志)에 타는 검은 욕망이여 나의 작은 방(房)은 등불을 켜 들고 그 속에서 술취한 윤선(輪船)과 같이 흔들리우고 있다. 유리창 넘어서 흘기는 어둠의 검은 눈짓에조차 소름치는 겁 많은 방(房)아
문 틈을 새어 흐르는 거리 위의 옅은 빛의 물결에 적시우며 흘러가는 발자국들의 포석을 따리는 작은 음향조차도 어둠은 기르려 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푸른 그림자마저 빼앗긴 거리의 시인 포풀라의 졸아든 몸뚱아리가 거리가 꾸부러진 곳에서 떨고 있다.
아담과 이브들은 `우리는 도시 어둠을 믿지 않는다'고 입과 입으로 중얼거리며 층층계를 내려간 뒤 지하실에서는 떨리는 웃음소리 잔과 잔이 마주치는 참담한 소리…… 높은 성벽 꼭대기에서는 꿈들을 내려 보내는 것조차 잊어버린 별들이 절망을 안고 졸고들 있다. 나는 불시에 나의 방의 작은 속삭임 소리에 놀라서 귀를 송굿인다. ―어서 밤이 새는 것을 보고 싶다― ―어서 새날이 오는 것을 보고 싶다―
기상도, (자가본),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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