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시인 / 재판
의롭고 당당해야겠다 재판은 백해무익한 일을 밥먹듯 하면서도 뉘우치는 일 없으니 도대체 너는 무엇을 꿈꾸는 것이냐 소리지르지 마라 사람을 알기를 허수아비로 알고 있다 한 식구가 모여 앉아 지켜보는 적도 있으나 네가 기특해서인 줄 알면 잘못이다 기가 막히고 답답해서 죽어버리지 못해 본다면 본다 너를 보고 있으면 머리가 나빠지는구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냐 이토록 불공평한 세상 이치를 당장 바로잡을 생각 하는 일 아니겠느냐 너는 여기에 잿가루를 뿌리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헛바람만 불어넣었다 목숨 부지하는 일도 어려운 판에 산더미 같은 호화상품 선전이 무엇이냐 이 나라 아이들은 모조리 직업 야구선수와 농구선수 되란 말이냐 못 먹고 못 배워도 분칠하고 서양춤 출 것이냐 무엇보다도 네게선 제국주의 냄새가 나서 질색이다 이만큼한 침략에도 부족하여 무엇을 더 빼앗겠단 것이냐 그만 빼앗아라 그만 짓밟고 그만 속여라 오만한 목청 돋구어 노동에 지친 곤한 잠 깨우지 말며 어린것들 순박한 꿈 멍들게 하지 마라 두고 봐야 허황한 놀음이다 말이면 다 말이냐 너의 말장난질은 중형이 마땅하다 그만 쳐라 북을 너는 죄없는 백성들 귀한 시간 빼앗는 기세 좋은 도적이다 양놈 왜놈 합세하여 못살게 굴지 마라 분단을 영구화하지 마라 가난한 자와 억울한 자를 사랑하는 척도 하지 마라 여상한 죄로 재판에 회부된 너는 네모난 상자 속에 숨은 요사스런 적이구나 엄한 눈하고 시청료 받아먹는.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김규동 시인 / 전쟁(戰爭)과 나비
능선(陵線)마다 나부껴 오는 검은 사정권(射程圈)
속력(速力)의 질주(疾走)는 나의 육체(肉體)의 부분(部分)들을 역사(轢死)시켰다.
때마침 흑인병사(黑人兵士)의 보행(步行)은 나의 환상(幻想)속에 코뮤니즘과 같은 붉은 유혈(流血)을 전파(電波)하고 수술대(手術臺)에 누운 나는 창백(蒼白)한 나의 신경조직(神經組織)의 반사(反射)를 바라다본다.
광란(狂亂)하는 바다 파열(破裂)하는 빛깔 속에 낙하(落下)하여 가는 선수(選手)들의 포물선(抛物線)―
그럴 때마다 새하얀 광선(光線)을 쓰며 전쟁(戰爭)의 언덕을 올라오는 어린 나비들은 검은 영상(影像)속에 마그네슘처럼 투명(透明)한 아침을 폭발(爆發)시키는 것이었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진공회담(眞空會談)
―무수한 교수시체(絞首屍體)와 이동(移動)하는 두개골(頭蓋骨)과 여자(女子)의 푸른 골반(骨盤)으로 형성(形成)된 벽(壁)속에서 파수병(派守兵)은 거꾸로 서서 마태복음(馬太福音) 제3장(第三章)을 암송(暗誦)한다―
프로이드 박사(博士)는 흰 까운에 하얀 마스크를 차고 간호원(看護員) 큐―리와 함께 층계(層階)를 올라오는 것이다.
'체온(體溫)은 영도(零度) 평온(平溫)입니다.'
―처음날은 황제(皇帝)의 결혼식(結婚式)에 영구차(靈柩車)를 타고 참석(參席)했습니다. 다음날은 열차(列車)의 특등실(特等室)에서 여자(女子)를 강간한 일이 있습니다. ―다음날엔 애인(愛人) 나타―리의 유방(乳房)을 권총으로 사격(射擊)했지요. ―그 다음날 나는 커―피 깡통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오후(午後)엔 대학(大學)의 하늘 닿는 고층(高層)에서 투신자살(投身自殺)을 기도(企圖)하였습니다.
'간호원(看護員) 큐―리! 외과실(外科室)에서 수술준비(手術準備)를 하십시오. 절단수술(切斷手術) 입니다.'
―절망(絶望)입니까? 프로이드박사(博士)……
간호원(看護員) 큐―리의 뒤를 따라 뚜걱 뚜걱 층계(層階)를 밟는 프로이드 박사(博士)의 두상(頭上)에서는 대리석(大理石) 원주(圓柱)에 부딪치는 유리컵처럼 찬란한 폭소(爆笑)가 터져나올 뿐이었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침묵(沈黙)의 소리
도회(都會)의 밤을 전쟁(戰爭)처럼 소란케 하는 연기(煙氣)와 네온
밝은 불빛 아래 섰으면서도 두뇌(頭腦)의 폐허(廢墟)위를 분류(奔流)처럼 스쳐가는 건 암흑(暗黑)의 강(江)이다.
잠든 어린 아이들의 의식(意識)속에도 흐르는 강(江)물 피를 흘리는 어린 애기의 잠꼬대를 잊을 수가 없어 사람들이여 이 처절한 오늘의 소리는 어데로 가는 것인가.
바다와 산맥(山脈), 미래(未來)가 응시(凝視)하는 과거(過去)에의 향수(鄕愁),
북국(北國)의 월야(月夜)를 지키는 수목(樹木)의 그늘처럼 쓸쓸한 인간(人間)의 지성(知性)과 애정(愛情)의 계곡에서 오늘의 치륜(齒輪)은 탄생(誕生)과 죽음을 한데 섞으며 새로운 싸움을 선언(宣言)하는 것이다.
한장 스테판․말라르메의 달이 걸려 있는 천공(天空)
이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운행(運行) 속을 아 이 밤을 침묵(沈黙)의 소리가 가고 있다.
현대의 신화, 위성문화사,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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