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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규동 시인 / 재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9.

김규동 시인 / 재판

 

 

의롭고 당당해야겠다 재판은

백해무익한 일을 밥먹듯 하면서도

뉘우치는 일 없으니

도대체 너는 무엇을 꿈꾸는 것이냐

소리지르지 마라

사람을 알기를 허수아비로 알고 있다

한 식구가 모여 앉아

지켜보는 적도 있으나

네가 기특해서인 줄 알면 잘못이다

기가 막히고 답답해서

죽어버리지 못해 본다면 본다

너를 보고 있으면 머리가 나빠지는구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냐

이토록 불공평한 세상 이치를

당장 바로잡을 생각 하는 일 아니겠느냐

너는 여기에 잿가루를 뿌리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헛바람만 불어넣었다

목숨 부지하는 일도 어려운 판에

산더미 같은 호화상품 선전이 무엇이냐

이 나라 아이들은 모조리

직업 야구선수와 농구선수 되란 말이냐

못 먹고 못 배워도

분칠하고 서양춤 출 것이냐

무엇보다도 네게선

제국주의 냄새가 나서 질색이다

이만큼한 침략에도 부족하여

무엇을 더 빼앗겠단 것이냐

그만 빼앗아라

그만 짓밟고 그만 속여라

오만한 목청 돋구어

노동에 지친 곤한 잠 깨우지 말며

어린것들 순박한 꿈 멍들게 하지 마라

두고 봐야 허황한 놀음이다

말이면 다 말이냐

너의 말장난질은 중형이 마땅하다

그만 쳐라 북을

너는 죄없는 백성들

귀한 시간 빼앗는 기세 좋은 도적이다

양놈 왜놈 합세하여 못살게 굴지 마라

분단을 영구화하지 마라

가난한 자와 억울한 자를

사랑하는 척도 하지 마라

여상한 죄로 재판에 회부된 너는

네모난 상자 속에 숨은 요사스런 적이구나

엄한 눈하고 시청료 받아먹는.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김규동 시인 / 전쟁(戰爭)과 나비

 

 

능선(陵線)마다

나부껴 오는

검은 사정권(射程圈)

 

속력(速力)의 질주(疾走)는

나의

육체(肉體)의 부분(部分)들을

역사(轢死)시켰다.

 

때마침

흑인병사(黑人兵士)의 보행(步行)은

나의 환상(幻想)속에

코뮤니즘과 같은

붉은 유혈(流血)을 전파(電波)하고

수술대(手術臺)에 누운 나는

창백(蒼白)한

나의 신경조직(神經組織)의

반사(反射)를 바라다본다.

 

광란(狂亂)하는 바다

파열(破裂)하는 빛깔 속에

낙하(落下)하여 가는

선수(選手)들의 포물선(抛物線)―

 

그럴 때마다

새하얀 광선(光線)을 쓰며

전쟁(戰爭)의 언덕을 올라오는

어린 나비들은

검은 영상(影像)속에 마그네슘처럼

투명(透明)한 아침을 폭발(爆發)시키는 것이었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진공회담(眞空會談)

 

 

―무수한 교수시체(絞首屍體)와 이동(移動)하는 두개골(頭蓋骨)과 여자(女子)의 푸른 골반(骨盤)으로 형성(形成)된 벽(壁)속에서 파수병(派守兵)은 거꾸로 서서 마태복음(馬太福音) 제3장(第三章)을 암송(暗誦)한다―

 

프로이드 박사(博士)는 흰 까운에 하얀 마스크를 차고

간호원(看護員) 큐―리와 함께 층계(層階)를 올라오는 것이다.

 

'체온(體溫)은 영도(零度) 평온(平溫)입니다.'

 

―처음날은 황제(皇帝)의 결혼식(結婚式)에 영구차(靈柩車)를 타고 참석(參席)했습니다.

다음날은 열차(列車)의 특등실(特等室)에서 여자(女子)를 강간한 일이 있습니다.

―다음날엔 애인(愛人) 나타―리의 유방(乳房)을 권총으로 사격(射擊)했지요.

―그 다음날 나는 커―피 깡통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오후(午後)엔 대학(大學)의 하늘 닿는 고층(高層)에서 투신자살(投身自殺)을 기도(企圖)하였습니다.

 

'간호원(看護員) 큐―리! 외과실(外科室)에서 수술준비(手術準備)를 하십시오. 절단수술(切斷手術) 입니다.'

 

―절망(絶望)입니까? 프로이드박사(博士)……

 

간호원(看護員) 큐―리의 뒤를 따라

뚜걱

뚜걱

층계(層階)를 밟는

프로이드 박사(博士)의 두상(頭上)에서는

대리석(大理石) 원주(圓柱)에 부딪치는

유리컵처럼

찬란한 폭소(爆笑)가 터져나올 뿐이었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침묵(沈黙)의 소리

 

 

도회(都會)의 밤을

전쟁(戰爭)처럼 소란케 하는

연기(煙氣)와 네온

 

밝은 불빛 아래 섰으면서도

두뇌(頭腦)의 폐허(廢墟)위를

분류(奔流)처럼 스쳐가는 건 암흑(暗黑)의 강(江)이다.

 

잠든

어린 아이들의 의식(意識)속에도

흐르는 강(江)물

피를 흘리는

어린 애기의 잠꼬대를

잊을 수가 없어

사람들이여

이 처절한

오늘의 소리는

어데로 가는 것인가.

 

바다와 산맥(山脈),

미래(未來)가 응시(凝視)하는 과거(過去)에의 향수(鄕愁),

 

북국(北國)의 월야(月夜)를 지키는 수목(樹木)의 그늘처럼

쓸쓸한 인간(人間)의 지성(知性)과 애정(愛情)의 계곡에서

오늘의 치륜(齒輪)은

탄생(誕生)과 죽음을 한데 섞으며

새로운 싸움을 선언(宣言)하는 것이다.

 

한장

스테판․말라르메의 달이 걸려 있는 천공(天空)

 

이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운행(運行) 속을

아 이 밤을 침묵(沈黙)의 소리가 가고 있다.

 

현대의 신화, 위성문화사, 1958

 

 


 

김규동 시인(金奎東 1925~2011)

호는 문곡(文谷). 1925년 2월 13일 함북 경성 출생. 경성고보를 거쳐 1946년 연변의대를 수료했고 평양종합대학을 중퇴했다. 경성고보시절 스승 김기림(金起林)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시 「강」이 당선되어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며, 1951년 박인환(朴寅煥)‧김경린(金璟麟) 등과 함께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했다.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는 살리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포대가 있는 풍경」이 각각 당선되기도 했다.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했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역임한 바 있다. 그의 시작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나비와 광장』(1955), 『현대의 신화』(1958) 등을 발간했던 1960년 초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포대가 있는 풍경」, 「어느 병상의 연대」 등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쟁 관련 소재,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의식, 현실의 비판적 추구 등의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많이 발표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시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으로 활동한 것은 그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이 시기의 시적 경향은 시집 『죽음 속의 영웅』(1977), 『깨끗한 희망』(1985), 『오늘 밤 기러기떼는』(1989)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시는 통일문제, 노사문제, 학생시위 등 현실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거니와, 이는 현실의 문제에 능동적인 참여와 실천을 강조한 사회파 모더니즘으로의 적극적인 변모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시집으로는 『나비와 광장』(1955), 『현대의 신화』(1958), 『죽음 속의 영웅』(1977), 『깨끗한 희망』(1985), 『오늘 밤 기러기떼는』(1989), 『느릅나무에게』(2005) 등이 있고, 시선집 『생명의 노래』(1991), 『길은 멀어도』(1991), 『흰각시 붓꽃』(1993) 등이 있다. 2011년 시인의 시 432편을 모은 『김규동 시전집』이 창비사에서 발간되었다. 시작 이외에 평론활동도 꾸준히 계속하여 『새로운 시론』(1959), 『지성과 고독의 문학』(1962),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1979) 등의 평론집을 내기도 했으며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2011)이 있다. 1960년에 자유문인회협상, 2006년 만해문학상, 201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99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1년 9월 28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