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시인 / 테레타이프의 가을
소녀(少女)는 투명(透明)한 유리컵에 한줌의 서정(抒情)을 따라 놓고 거리의 바람 속에 종이조각처럼 사라져 갔다.
갑자기 현기증(眩氣症)이 남는 머리를 신문지(新聞紙)에 기대고 오늘의 일과(日課)를 헤아려 볼 때 성냥개비 같은 붓대에 매어달린 나의 가족(家族)들은 오늘의 천기(天氣)에 대하여 테레타이프처럼 시끄러운 불만(不滿)을 배앝기만 한다.
먼지 속에 퇴색(褪色)해 가는 나의 책장 떨어진 구두 오늘도 한국의 하늘은 높푸른 애수(哀愁)에 잠기고 파도(波濤) 모양 설레이는 계절(季節)의 소식(消息)은 아득한 먼 날의 비행운(飛行雲)처럼 쓸쓸한 원경(遠景)을 불러 오고 있다.
현대의 신화, 위성문화사, 1958
김규동 시인 / 통일의 빛살
하늘 위의 바다 일렁이는 구름밭 헤치고 드높이 솟은 바다 거대한 잔 받들어 하늘을 열고 땅을 열어 오천 년 역사를 이루었나니 백두산이여 천지, 넘치는 생명의 물이여 바람 소리 흐느껴 빛살 온누리에 나부끼고 그윽한 징소리 넘치게 울려퍼져 하나인 숨결 하나인 뜻 찬연히 이었나니 겨레의 맥박인 백두산이여 열두 개의 연봉 병풍처럼 둘러선 그 꼭대기 병사봉 벼랑 밑 삼십 리 둘레에 퍼진 검푸른 물은 송화강 흑룡강 두만강 압록강 끝까지 마를 줄 모르는 젖줄 되어 흐르나니 크도다 장하도다 우리의 산이여 자작나무 이깔나무 우거진 밀림 속 장백산 굽이굽이 겨레의 혼과 입김 면면히 스며 삼라만상 도도히 물결치는 장엄한 노래 백두산은 우리의 힘이고나 맑디맑은 천지물은 자유와 평화의 애틋한 샘이고나 마천령의 힘찬 숨결 남으로 길게 뻗어 함경산맥 개마고원 넘어 태백 차령의 준령 이루고 노령 소백의 큰 기둥 지리산에 닿아 다시 한라로 이어진 오직 하나인 혈맥 삼천리 강토 금 없이 연이은 하나인 땅이여 하늘이여 오, 통일과 만남의 산 백두산 희망과 평화의 바다 백두산 천지 온갖 슬픔 온갖 어둠 사르며 이제 새날이 밝는다 우리 모두 엎드려 큰절 올리나니 이제야말로 이 애절한 그리움과 염원 위에 통일과 행복의 날을 내려주소서 민족의 큰 산 백두산이여.
오늘밤 기러기떼는, 동광출판사, 1989
김규동 시인 / 포대(砲台)가 있는 풍경(風景)
바다를 향한 옥상(屋上)의 대공포대(對空砲臺) 위에서 젊은 병사(兵士)는 해양천리(海洋千里) 먼 고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연막(煙幕)처럼 흰구름 밀려가는 여름 하늘 아래를 갈 길을 잃은 짐승 마냥 사람들은 밀려가고 밀려오고, 투명(透明)한 바다의 행렬(行列)에 지친 적은 배들이 오후(午後)의 피곤한 그늘에 그 무엔가 그리움과 같은 기폭을 나부껴 올 때
포대(砲臺)를 지키고 선 이국병사(異國兵士)는 소리 없는 리라의 음성(音聲)에 귀 기울여 간다.
오! 리라여 한(恨) 많은 1953년(年)의 기류(氣流)는 얼마나 당신이 그리운 계절(季節)이었습니까?
바다와 하늘 사이를 신념(信念)처럼 내닫는 검은 포신(砲身).
지금 도시(都市)는 괴로운 투영(投影)을 안고 분주(奔走)한 일모(日暮) 속에 침전(沈澱)하여 가고 있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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