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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함형수 시인 /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0.

함형수 시인 /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1936. 시인부락. 창간호>

 

 


 

 

함형수 시인 / 마음의 촛불

 

밤이 되면 밤마다 나의 마음 속에 켜지는

자그만 촛불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꺼질 듯

나의 외로운 영혼을 비춰 주는 희미한 불빛

 

그러나 나에게 반드시 깊은 묵상을 가져오고

한없이 먼 나그네길을 가리킵니다.

 

 


 

 

함형수 시인 / 9월의 시(詩)

 

 

하늘 끝없이 멀어지고

물 한없이 차지고

그 여인 고개 숙이고 수심(愁心)지는 9월.

기러기떼 하늘가에 사라지고

가을잎 빛 없고

그 여인(女人)의 새하얀 얼굴 더욱 창백하다.

눈물 어리는 9월.

구월(九月)의 풍경은 애처러운 한 편의 시(詩).

그 여인은 나의 가슴에 파묻혀 우다.

 

 


 

 

함형수 시인 / 교상(橋上)의 소녀(少女)

 

 

못견디듯미풍(微風)에하느적거리든실버들가지.

달콤한초조(焦燥)에떨며소녀(少女)는분홍(粉紅)빛양산(陽傘)을쉴새없이돌렸다

그러나다리아래의흐르는물이그급(急)한소년(少年)의걸음보다도쉬지않는것을소녀(少女)는몰랐다

 

 


 

함형수 시인 (咸亨洙 1914년~1946년)

함형수(咸亨洙, 1916-1946) 시인. 함북 경성 출생. 중앙불교전문학교 중퇴.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음” 당선. 생명파(生命派)다운 열정과 기발한 시상을 보였다. 가난하여 노동자 숙박소를 전전, 만주 제국의 소학교 훈도 시험에 합격, 부임했다가, 북한에서 해방 뒤 정신 이상으로 사망.

세상에 발표된 그의 시는 10여 편에 불과하지만, 동경(憧憬)의 꿈과 소년적(少年的) 애수를 주조로 하는 개성 있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방 후 고향에서 사망 / 대표작 <해바라기의 비명>, <무서운밤>, <조가비>, <신기루>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