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시인 / 하늘과 태양(太陽)만이 남아... 원제 : 하늘과 태양(太陽)만이 남아 있는 도시(都市)
슈―샤인
애수(哀愁)에 젖어 소리에 젖어 오늘도 나는 이 거리에서 도대체(都大體) 어데로 가는 것인가.
계절(季節)을 잃은 남루를 걸치고 숱한 사람들속 사람에 부대끼며 수없는 시선(視線)에 사살(射殺)되면서 하늘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인제 저 푸른 하늘이 마시고 싶어 이렇게 가슴 태우며 오늘도 이 거리에서 나는 어데로 가는 것이냐
간판(看板)이 커서 슬픈 거리여 빛깔이 짙어서 서글픈 도시(都市)여
츄―잉껌을 씹어 철사(鐵絲)처럼 가느러간 허리들이 색깔 검은 아이를 배었다는 이야기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방금― 회색(灰色)의 지평(地平)을 넘어 달려온 그 하이야―가 초록빛 커―텐이 흘러나오는 이층(二層)집 여인(女人)들의 허리춤에 보석훈장(寶石勳章)을 채워줬담도 아무것도 아닌 그저 흘러버릴 수 있는 소문(所聞)이란다.
그 어느날 바닷가에서 가을이 비오는 바닷가에서 갈매기가 그리는 애상(哀想)의 포물선(抛物線)에 흰 이마를 적시우며 젊은 소설가(小說家)는 그가 거느린 가족(家族)의 몰살을 기도(祈禱)하였고 나는 나대로 전(前)날― 컴컴한 와사등(瓦斯燈)의 지하실(地下室)에서 하―얀 환약(丸藥)을 삼키고 쓰러진 시인(詩人)의 손을 잡았던 것도 벌써 아무것도 아닌 지나간 이야기여서
쇼―윈도의 추녀밑에 멈춰서면 아 그대와 나 이 거리에서 참말 떳떳한 몽유병자(夢遊病者)였구려.
오늘도 밀선(密船)은 홍콩[香港]에서 하와이에서 대만(臺灣)에서 파라솔처럼 팽팽한 하늘을 둘러쓰고 이 항구(港口)로 달려든다 하였지―
몰아치는 검은 바람을 안고 섬의 공장(工場) 굴뚝들은 폐마처럼 숨이 가쁘냐.
한폭 정물(靜物)처럼 고요한 전함(戰艦)들이 뒹굴어 있는 오후(午後)의 해상(海上)에 그림자를 흘리며 비행기(飛行機)는 허망한 공간(空間)에서 내일(來日)이 권태롭구나.
파스포―드처럼 쉽게 통과(通過)하는 로―타리의 물결에 섞여―
슈―샤인
애수(哀愁)에 젖어 음향(音響)에 젖어 저물어가는 태양(太陽)아래 아 나는 어데로 가는 것인가 간판(看板)이 커서 기울어진 거리여 아아 빛깔이 짙어 서글픈 도시(都市)여.
나비와 광장(廣場),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한 시대
작은 돌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돌을 피하여 달아나는 바람이 내게 와닿는 소리가 들린다 무겁고 어두운 겨울 속으로부터 뛰쳐나온 사내들은 대부분 온데간데 없다 날이 밝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하여 눈을 부비며 나서는 기둥과 벽이 음산한 삼림(森林)을 돌아 내게로 온다 타다 남은 마음의 공터에 불을 붙이면 죽음의 냄새는 심장 가까이 와서 새의 깃소리같이 파닥거린다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물 위에 떨어진 달이 흔들리는 것을 본다 한 시대의 기묘한 얼굴이 물 속에 잠긴다 깊은 수심(水深)이다 손이 금속(金屬)에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죽음속의 영웅, 근역서재, 1977
김규동 시인 / 호남평야
이 넓은 들판을 끝 닿은 데 없이 넓은 벌판을 새매 한 마리 날지 않고 아쉬움인가 어여쁜 눈물자죽 빛내며 해는 진다 나락은 모두 거둬들였으나 땀흘려 일한 사람들 무엇을 나눠 가졌을까 착한 마음밖에 가진 것 없는 사람들 무엇을 나눠 가졌을까 텅 빈 들판에 남은 건 정지된 시간의 흐름이다 가슴에 넘치는 고요함이다 서울서 온 양복쟁이는 여기를 지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딴전만 부리는구나 딴소리만 드뇌이며 가는구나.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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