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김규동 시인 / 하늘과 태양(太陽)만이 남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1.

김규동 시인 / 하늘과 태양(太陽)만이 남아...

원제 : 하늘과 태양(太陽)만이 남아 있는 도시(都市)

 

 

슈―샤인

 

애수(哀愁)에 젖어

소리에 젖어

오늘도 나는 이 거리에서

도대체(都大體) 어데로 가는 것인가.

 

계절(季節)을 잃은 남루를 걸치고

숱한 사람들속 사람에 부대끼며

수없는 시선(視線)에 사살(射殺)되면서

하늘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인제 저 푸른 하늘이 마시고 싶어

이렇게 가슴 태우며

오늘도 이 거리에서

나는 어데로 가는 것이냐

 

간판(看板)이 커서 슬픈 거리여

빛깔이 짙어서 서글픈 도시(都市)여

 

츄―잉껌을 씹어

철사(鐵絲)처럼

가느러간 허리들이

색깔 검은 아이를 배었다는 이야기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방금―

회색(灰色)의 지평(地平)을 넘어

달려온

그 하이야―가

초록빛 커―텐이 흘러나오는 이층(二層)집

여인(女人)들의 허리춤에

보석훈장(寶石勳章)을 채워줬담도

아무것도 아닌

그저 흘러버릴 수 있는 소문(所聞)이란다.

 

그 어느날

바닷가에서

가을이 비오는 바닷가에서

갈매기가 그리는 애상(哀想)의 포물선(抛物線)에

흰 이마를 적시우며

젊은 소설가(小說家)는

그가 거느린 가족(家族)의 몰살을 기도(祈禱)하였고

나는 나대로

전(前)날―

컴컴한 와사등(瓦斯燈)의 지하실(地下室)에서

하―얀 환약(丸藥)을 삼키고 쓰러진

시인(詩人)의 손을 잡았던 것도

벌써 아무것도 아닌 지나간 이야기여서

 

쇼―윈도의 추녀밑에 멈춰서면

그대와 나

이 거리에서

참말 떳떳한 몽유병자(夢遊病者)였구려.

 

오늘도 밀선(密船)은

홍콩[香港]에서

하와이에서

대만(臺灣)에서

파라솔처럼 팽팽한

하늘을 둘러쓰고

이 항구(港口)로 달려든다 하였지―

 

몰아치는

검은 바람을 안고

섬의

공장(工場) 굴뚝들은

폐마처럼 숨이 가쁘냐.

 

한폭

정물(靜物)처럼

고요한 전함(戰艦)들이 뒹굴어 있는

오후(午後)의 해상(海上)에 그림자를 흘리며

비행기(飛行機)는 허망한 공간(空間)에서

내일(來日)이 권태롭구나.

 

파스포―드처럼 쉽게 통과(通過)하는

로―타리의 물결에 섞여―

 

슈―샤인

 

애수(哀愁)에 젖어

음향(音響)에 젖어

저물어가는 태양(太陽)아래

아 나는 어데로 가는 것인가

간판(看板)이 커서 기울어진 거리여

아아 빛깔이 짙어 서글픈 도시(都市)여.

 

나비와 광장(廣場),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한 시대

 

 

작은 돌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돌을 피하여

달아나는 바람이

내게 와닿는 소리가 들린다

무겁고 어두운 겨울 속으로부터

뛰쳐나온 사내들은

대부분 온데간데 없다

날이 밝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하여

눈을 부비며 나서는 기둥과 벽이

음산한 삼림(森林)을 돌아

내게로 온다

타다 남은 마음의 공터에

불을 붙이면

죽음의 냄새는 심장 가까이 와서

새의 깃소리같이 파닥거린다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물 위에 떨어진 달이

흔들리는 것을 본다

한 시대의 기묘한 얼굴이

물 속에 잠긴다

깊은 수심(水深)이다

손이 금속(金屬)에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죽음속의 영웅, 근역서재, 1977

 

 


 

 

김규동 시인 / 호남평야

 

 

이 넓은 들판을

끝 닿은 데 없이 넓은 벌판을

새매 한 마리 날지 않고

아쉬움인가

어여쁜 눈물자죽 빛내며

해는 진다

나락은 모두 거둬들였으나

땀흘려 일한 사람들

무엇을 나눠 가졌을까

착한 마음밖에 가진 것 없는 사람들

무엇을 나눠 가졌을까

텅 빈 들판에 남은 건

정지된 시간의 흐름이다

가슴에 넘치는 고요함이다

서울서 온 양복쟁이는

여기를 지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딴전만 부리는구나

딴소리만 드뇌이며 가는구나.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김규동 시인(金奎東 1925~2011)

호는 문곡(文谷). 1925년 2월 13일 함북 경성 출생. 경성고보를 거쳐 1946년 연변의대를 수료했고 평양종합대학을 중퇴했다. 경성고보시절 스승 김기림(金起林)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시 「강」이 당선되어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며, 1951년 박인환(朴寅煥)‧김경린(金璟麟) 등과 함께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했다.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는 살리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포대가 있는 풍경」이 각각 당선되기도 했다.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했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역임한 바 있다. 그의 시작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나비와 광장』(1955), 『현대의 신화』(1958) 등을 발간했던 1960년 초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포대가 있는 풍경」, 「어느 병상의 연대」 등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쟁 관련 소재,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의식, 현실의 비판적 추구 등의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많이 발표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시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으로 활동한 것은 그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이 시기의 시적 경향은 시집 『죽음 속의 영웅』(1977), 『깨끗한 희망』(1985), 『오늘 밤 기러기떼는』(1989)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시는 통일문제, 노사문제, 학생시위 등 현실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거니와, 이는 현실의 문제에 능동적인 참여와 실천을 강조한 사회파 모더니즘으로의 적극적인 변모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시집으로는 『나비와 광장』(1955), 『현대의 신화』(1958), 『죽음 속의 영웅』(1977), 『깨끗한 희망』(1985), 『오늘 밤 기러기떼는』(1989), 『느릅나무에게』(2005) 등이 있고, 시선집 『생명의 노래』(1991), 『길은 멀어도』(1991), 『흰각시 붓꽃』(1993) 등이 있다. 2011년 시인의 시 432편을 모은 『김규동 시전집』이 창비사에서 발간되었다. 시작 이외에 평론활동도 꾸준히 계속하여 『새로운 시론』(1959), 『지성과 고독의 문학』(1962),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1979) 등의 평론집을 내기도 했으며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2011)이 있다. 1960년에 자유문인회협상, 2006년 만해문학상, 201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99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1년 9월 28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