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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기림 시인 / 시론(詩論)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1.

김기림 시인 / 시론(詩論)

 

 

―여러분―

여기는 발달된 활자의 최후의 층계올시다

단어의 시체를 짊어지고

일본 종이의

표백한 얼굴 위에

거꾸러져

헐떡이는 활자―

 

`뱀'을 수술한

백색 무기호문자(無記號文字)의 해골의 무리―

역사의 가슴에 매어 달려

죽어가는 단말마

시의 샛파란 입술을

축여 줄 `쉼표'는 없느냐?

 

공동 변소―

오랫동안 시청의 소제부가 잊어버린 질식한 똥통 속에

어느 곳 쎈티멘탈한 영양(令孃)이 흐리고 간

타태(墮胎)한 사아(死兒)를 시(市)의 검찰관의

삼각(三角)의 귀밑 눈이 낚시질했다

 

―시(詩)다―부라보―

 

나기를 너무 일찍이 한 것이여

생기기를 너무 일찍이 한 것이여

감격의 혈관을 탈장당한

죽은 `언어'의 대량 산출 홍수다.

사해(死海)의 혼탁―경계해라

 

시(詩)의 궁전에―골동의 페허에

시(詩)는 질식했다

안젤러쓰여

선세기(先世紀)의

오랜 폐인(廢人)

시(詩)의 조종(弔鍾)을

울려라

1930년의 들에

예술(藝術)의 무덤 위에

우리는 흙을 파 얹자

 

`애상(哀傷)'의 매음부가

비장의 법의(法衣)를 도적해 두르고

거리로 끌고 간다

모―든 슬픔이

예술(藝術)의 이름으로

대륙과

바다―

모―든 목숨의

왕좌를 짓밟는다

 

탁류―탁류―탁류

쎈티멘탈리즘의 홍수

커다란 어린애 하나가

화강(花崗) 채찍을 휘두른다

 

무덤을 꽃피운

구원할 수 없는 황야

예술의 제단을 휩쓸어버리려고

 

위선자와

느렁쟁이―`어저께'의 시(詩)들이여

잘 있거라

우리들은 어린아이니

심볼리즘의

장황한 형용사의 줄느림에서

예술의 손을 이끌자

 

한 개의

날뛰는 명사

꿈틀거리는 동사

춤추는 형용사

(이건 일찍이 본 일 없는 훌륭한 생물이다)

그들은 시(詩)의 다리[脚]에서

생명(生命)의 불을

뿜는다.

시(詩)는 탄다 백 도로―

빛나는 푸라티나의 광선의 불길이다

 

모―든 율법과

모랄리티

판단

―그것들 밖에 새 시(詩)는 탄다.

아스팔트와

그리고 저기 렐 위에

시는 호흡한다.

시―딩구는 단어.

 

조선일보, 1931. 1. 16

 

 


 

 

김기림 시인 / 아롱진 기억(記憶)의 옛 바다를 건너

 

당신은 압니까.

해오라비의 그림자 거꾸로 잠기는 늙은 강 위에 주름살 잡히는 작은 파도를 울리는 것은 누구의 장난입니까.

그리고 듣습니까. 골짝에 쌓인 빨갛고 노란 떨어진 잎새들을 밟고 오는 조심스러운 저 발차취 소리를―

 

클레오파트라의 눈동자처럼 정열에 불타는 루비빛의 임금(林檎)이 별처럼 빛나는 잎사귀 드문 가지에 스치는 것은 또한 누구의 옷자락입니까.

 

지금 가을은 인도의 누나들의 산호빛의 손가락이 짠 나사의 야회복을 발길에 끌고 나의 아롱진 기억의 옛 바다를 건너 옵니다.

 

나의 입술 가에 닿는 그의 피부의 촉각은 석고와 같이 희고 수정(水晶)과 같이 찹니다.

잔인한 그의 손은 수풀 속의 푸른 궁전에서 잠자고 있는

귀뚜라미들의 꿈을 흔들어 깨우쳐서 그들로 하여금 슬픈 쏘푸라노를 노래하게 합니다.

지금 불란서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검은 포도송이들이

사라센의 포장에 놓인 것처럼 종용이 달려 있는 덩굴 밑에는 먼 조국을 이야기하는 이방(異邦) 사람들의 작은 잔채가 짙어 갑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순교자의 찢어진 심장과 같이 갈라진

과육(果肉)에서 흐르는 붉은 피와 같은 액체를 빨면서 우리들의

먼 옛날과 잊어버렸던 순교자들을 이야기하며 웃으며 이야기하며 울려

저 덩굴 밑으로 아니 오렵니까.

 

신동아, 1932. 12

 

 


 

 

김기림 시인 / 아프리카 광상곡(狂想曲)

 

 

숨막히는 독와사(毒瓦斯)에 썩은 티끌이 쓸려간 뒤에

성도(聖都)의 아침에 왕조(王朝)의 역사(歷史)는 간 데 없고

어느새 로―마의 풍속(風俗)을 단장한 추장(酋長)의 따님의

흉내내는 국가(國歌)의 서투른 곡조가 웬일이냐

 

급한 발길을 행여 막으려 다투어 던지는

진홍(眞紅)빛 장미의 언덕을 박차며

열사(熱沙)를 뿜으며 몰려오는

검은 쇠바퀴…… 검은 말발굽 소리……

 

테―블에 쏟아지는 샴펜의 폭포(瀑布).

`소생하는 로마야 마셔라 기린(麒麟)의 피를……

정의(正義)도 상아(象牙)도 문명(文明)도 석유(石油)도 우리 것이다'

법왕(法王)의 종(鐘)들과 라디오가 마을 마을에 요란하다.

 

다―샨화산(火山)에 불이 꺼진 날

새로 엮인 페―지에 세기(世紀)의 범행(犯行)이 임리하구나.

입담은 증인(證人)인 청(靑)나일이 혼자

애사(哀史)를 중얼거리며 애급(埃及)으로 흩으더라.

 

오늘은 삼색기(三色旗)의 행진(行進)을 축복(祝福)하는

사막(沙漠)의 태양(太陽).

차―나호(湖) 푸른 거울에

오월(五月)의 얼굴이 태연하구나.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金起林, 1908. 5.11 ~?]시인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에서 출생.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대학을 거쳐, 도호쿠제국대학 영어영문과 졸업. 1930년대 초반에 《조선일보》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 1. 23) · 〈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學燈 창간호, 1931. 10.) ∙ 〈고대(苦待)〉(新東亞 창간호, 1931. 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하고, 주지주의에 관한 단상(斷想)인〈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 1. 27.)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  문학 활동은 九人會(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 이론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학사적 공적으로 남아 있음. 모더니즘 이론에 입각하여 창자고가 비평에서 두루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다소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도 했음.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됨. 대표 저서로는 시집으로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새노래』 등과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고,  비평 및 이론서로『문학개론』, 『시론』, 『시의 이해』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