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새해의 노래
역사의 복수 아직 끝나지 않았음인가 먼 데서 가까운 데서 민족과 민족의 아우성 소리 어둔 밤 파도 앓는 소린가 별 무수히 무너짐인가?
높은 구름 사이에 애써 마음을 붙여 살리라 한들 저자에 사무치는 저 웅어림 닿지 않을까 보냐?
아름다운 꿈 지님은 언제고 무거운 짐이리라. 아름다운 꿈 버리지 못함은 분명 형벌보다 아픈 슬픔이리라.
이스라엘 헤매이던 2천년 꿈 속의 고향 시온은 오늘 돌아드는 발자국 소리로 소연코나.
꿈엔들 잊었으랴? 우리들의 시온도 통일과 자주와 민주 위에 세울 빛나는 조국. 우리들 낙엽지는 한두 살쯤이야 휴지통에 던지는 꾸겨진 쪼각일 따름 사랑하는 나라의 테두리 새 연륜으로 한 겹 굳어지라.
새해와 희망은 몸부림치는 민족에게 주자. 새해와 자유와 행복은 괴로운 민족끼리 나누어 가지자.
새노래, 아문각, 1948
김기림 시인 / 슈―르레알리스트
거리로 지나가면서 당신은 본 일이 없습니까 가을 볕으로 짠 장삼을 두르고 갈대 고깔을 뒷덜미에 붙인 사람의 어리꾸진 노래를― 괴상한 춤맵씨를― 그는 1950년 최후의 시민― 불란서 혁명의 말예(末裔)의 최후의 사람입니다 그의 눈은 프리즘처럼 다각(多角)입니다. 세계는 거꾸로 채광되어 그의 백색의 카메라에 잡혀집니다 새벽의 땅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에 그의 귀는 기울어지나 그는 그 뒤를 따를 수 없는 가엾은 절름발이외다. 자본주의 제3기의 메리 고―라운드로 출발의 전야의 반려(伴侶)들이 손목을 이끄나 그는 차라리 여기서 호올로 서서 남들이 모르던 수상한 노래에 맞추어 혼자서 그의 춤을 춤추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압니다. 이윽고 카지노폴리의 주악(奏樂)은 피곤해 끝이 나고 거리는 잠잠해지고 말 것을 생각지 말으세요. 그의 노래나 춤이 즐거운 것이라고 그는 슬퍼하는 인형(人形)이외다. 그에게는 생활(生活)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생활(生活)을 가지는 때 우리들의 피에로도 쓰러집니다.
조선일보, 1930. 9. 30
김기림 시인 / 시(詩)와 문화(文化)에 부치는 노래
손을 벌리면 산 넘어서 바다 건너서 사방에서 붙잡히는 뜨거운 체온 초면이면서도 만나자마자 가슴이 열려 하는 얘기가 진리와 미의 근방만 싸고돎이 자랑일세
그대 모자 구멍이 뚫려 남루가 더욱 좋구려 거짓과 의롭지 못한 것 위에 서리는 눈초리 노염 속에 감추인 인정의 불도가니 나라 나라마다 우리들 소리 외롭지 않아 미뿌이
나기 전부터도 시의 맥으로 이낀 어리석은 종족 피 아닌 계보가 보석처럼 빛나서 더욱 영롱타 도연명과 한용운과 노신과 타골 단테와 뽀들레르와 고리키와 오닐
포대와 국경을 비웃으며 마음 마음의 고집은 뚜껑을 녹이며 강처럼 계절처럼 퍼져오는 거부할 수 없는 물리 메마른 사막을 축이는 샘 어둠 속에 차오는 빛 세계와 고금에 넘쳐 흐르는 것이 아― 시여 문화여
새노래, 아문각,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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