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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함형수 시인 / 귀국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1.

함형수 시인 / 귀국

 

 

그들은 묻는다 내가 갔었던 곳을

무엇을 하였고 무엇을 얻었는가를

그러나 내 무엇이라 대답할꼬

누가 알랴 여기 돌아온 것은 한 개 덧없는 그림자 뿐이니

 

먼­하늘 끝에서

총과 칼의 수풀을 헤엄쳐

이 손과 이 다리로 모­든 무리를 무찔렀으나

그것은 참으로 또하나의 육체(肉體)였도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언어(言語)를 배웠고 새로운 행동(行動)을 배웠고

새로운 나라(國)와 새로운 세계(世界)와 새로운 육체(肉體)와를 얻었나니

여기 돌아온 것은 실(實)로 그의 그림자 뿐이로다

 

 


 

 

함형수 시인 / 그 애

 

 

내만 집 안에 있으면 그애는 배재밖 전신(電信)ㅅ대에 기댄 채 종시 들어오질 못하였다. 바삐 바삐 쌔하얀 운동복을 갈아입고 내가 웃방문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야 그애는 우리집에 들어갔다.

인제는 그애가 갔을 쯤 할 때 내가 가만히 집으로 들어가 얼굴을 붉히고 어머니에게 물으면 그애는 어머니가 권하는 고기도 안 넣은 시라기 장물에 풋콩 조밥을 말어 맛있게 먹고 갔다고 한다.

오랜만에 한번씩 저의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우리 집에 오든 그애는 우리집에 오는 것이 좋았나? 나뻤나?

퉁퉁한 얼굴에 말이 없든 애 ― 그애의 이름은 무에라고 불렀더라?

 

 


 

 

함형수 시인 / 나는 하나의 손바닥 우에

 

 

나는 하나의 피투성이된 손바닥 밑에 숨은 천사(天使)를 보았다

시간(時間)의 마술(魔術)이여 물질(物質)이여 먼지 같은 감상(感傷)이여

천사(天使)의 빛[光]이여 어두운 침상(寢牀)이여 돌[石]이여 눈물이여

나는 하나의 피투성이된 손바닥 우에 이상(異常)스러운 천사(天使)를 보았다

 

 


 

 

함형수 시인 / 무서운 밤

 

 

사나운몸부림치며밤내하늬바람은연약한바람벽을뒤흔들고미친듯울음치

며긴긴밤을눈보라는가난한볏짚이엉에몰아쳤으나굳게굳게닫히운증오(憎

惡)의창(窓)에밤은깊어도깊어도한그루의붉은순정(純情)의등(燈)불이꺼질

줄을모르고 무서웁게무서웁게어두운바깥을노려보는날카로운적-은눈동자

들이빛났다.

 

 


 

 

함형수 시인 / 신기루(蜃氣樓)

 

 

멀―리안개낀나루끝에어느날인가소년(少年)들이보았다는그이상(異常)한

혼례(婚禮)의행렬(行列)은그후한번도나타나지않았다

우두머니모래불에섰다가도하―얀파도가밀려와서발을벗으면

그만아모것도잊어버리고소년(少年)은물에뛰어들었다

 

 


 

 

함형수 시인 / 조가비

 

 

뜨거운모래벌을하로종일헤매며이것도저것도하고주워넣고는어두운저녁

저자에소년(少年)은이것도어느것도모조리던져버렸다

 

 


 

함형수 시인 (咸亨洙 1914년~1946년)

함형수(咸亨洙, 1916-1946) 시인. 함북 경성 출생. 중앙불교전문학교 중퇴.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음” 당선. 생명파(生命派)다운 열정과 기발한 시상을 보였다. 가난하여 노동자 숙박소를 전전, 만주 제국의 소학교 훈도 시험에 합격, 부임했다가, 북한에서 해방 뒤 정신 이상으로 사망.

세상에 발표된 그의 시는 10여 편에 불과하지만, 동경(憧憬)의 꿈과 소년적(少年的) 애수를 주조로 하는 개성 있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방 후 고향에서 사망 / 대표작 <해바라기의 비명>, <무서운밤>, <조가비>, <신기루>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