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시인 / 환상가로(幻想街路)
잊어버릴 수도 있고 또 사랑할 수도 있는 환상(幻想)의 언덕을 배회(徘徊)하며 친구와 더불어 나눈 우정(友情)이며 약속(約束)을 아무런 괴로움도 없이 망각(忘却)할 수 있는 날은 경사(傾斜)의 가로(街路)위에 회색(灰色)의 원경(遠景)이 지평선(地平線)처럼 다가들고 있었다.
자욱한 먼지 속에 대열(隊列)처럼 우중충 서 있는 푸라타너스의 그늘에서 가로수(街路樹)가 우리들의 모자(帽子)라고 우기던 시인(詩人)은, 이상(李箱)의 천재(天才) 위에 노―란 아이로니를 굴리면서 오늘의 행운(幸運)을 쓸쓸히 웃어가고, 다방(茶房)과 주점(酒店)은 오늘도 항구(港口)의 저녁 노을처럼 서글픈 잡음(雜音)에 싸여 모―든 그런 것들의 신문보도(新聞報道)와 아울러 돌아오지 않는 연대(年代)의 해협(海峽)위에 침전(沈澱)하여 갔을 뿐이다. 선수(選手)들은 지금― 아우성치는 도시(都市)의 반란(叛亂) 속에서 장미(薔薇)와 같은 편지(片紙) 조각을 뿌리며 회상(回想)의 층계(層階)를 밟고 있는 것이리.
총명한 밤의 장막(帳幕) 저쪽에서 끊임없는 미소(微笑)를 보내는 여자(女子)들의 푸른 나체(裸體)와 나체(裸體).
밀물처럼 밀려드는 전쟁(戰爭)의 소음(騷音)속에 비둘기들은 「콕토―」의 화술(話術)과 같은 원주(圓周)를 그려 올리고 투명(透明)한 공간(空間)을 타고 하―얀 사선(斜線)을 긋는 쎄이버 젯트기(機)의 비행(飛行)뒤에 나는 아득한 가로(街路)를 향하여 낙하(落下)하여 가는 나의 영상(映像)의 빈 대열(隊列)을 조감(鳥瞰)하고 있는 것이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희망을 위하여
아버지가 들어서자 아들아이는 두 달 전에 입고 나간 그 옷을 걸친 채로 머리를 떨구고 서 있었다 그래 몸은 어떠냐는 애비 말에 아버지 미안해요 하고 나직히 말했다 아이 옆에 섰던 어미가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 그러면서 겨우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중얼댔다 어미가 어떻게 해서 등록금 꾸려대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앞장은 왜 섰냐 하고 푸념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아버지는 새삼 저고리를 벗어 걸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했다 낙심 마라 인생은 길다 너희들이 만일 이 나라와 한몸뚱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막막할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서 부엌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여보 아이에게 어서 밥이나 줘요 울긴 왜 울어요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는 법이지 그러자 아이는 제 방으로 들어가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방에서는 뭐라고 주절대며 흐느껴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은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의 스산한 울음 소리였다.
오늘밤 기러기떼는, 동광출판사, 1989
김규동 시인 / 죽여주옵소서
놀다보니 다 가버렸어 산천도 사람도 다 가버렸어
제 가족 먹여살린답시고 바쁜 체 돌아다니다보니 빈 하늘 쳐다보며 쫓아다니다보니 꽃 지고 해 지고 남은 건 그림자뿐
가버렸어 그 많은 시간 다 가버렸어 이래서 한잔 저래서 한잔 먹을 것 입을 것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살다보니 아, 다 가버렸어 알맹이는 다 가버렸어 통일은 언제 되느냐 조국통일은 과연 언제쯤 오느냐
북녘 내 어머니시여 놀다 놀다 세월 다 보낸 이 아들을 백두산 물푸레나무 매질로 반쯤 죽여주소서 죽여주옵소서.
김규동 시인 / 노동하는 부처님
부처님은 왜 말이 없으신가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사연 지녔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왜 잠들지 않으시나요 잠자기엔 너무 많은 일이 밀렸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겨울 날씨에도 뻘뻘 땀을 흘리시며 안개 자욱한 사바세계의 길을 걸으신다
부처님 부처님 동에서도 서에서도 부처님 섬기는 소리 자욱한데 부처님은 동그라니 깊디깊은 정적만 놓아두고
남으로 북으로 분주히 떠도신다 휴전선도 마음대로 왕래하신다
공해와 비바람에 찢긴 일하는 부처님의 옷깃에 새로 돋은 저녁별이 찬란하다.
(김규동·시인,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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