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어린 공화국(共和國)이여
식은 화산 밑바닥에서 희미하게 나부끼던 작은 불길 말발굽 구르는 땅 아래서 수은처럼 떨리던 샘물 인제는 모란같이 피어나라 어린 공화국이여
그늘에 감춰온 마음의 재산 우리들의 오래인 꿈 어린 공화국이여 음산한 `근대'의 장렬(葬列)에서 빼앗은 기적 역사의 귀동자 어린 공화국이여
오― 명예도 지위도 부귀도 다 싫소 오직 그대 가는 길 멍에 밑 즐거운 노역(勞役)에 얽매어 주오 빛나는 공화국이여 그러고 안심하소서 젊은이 어깨에 그대 얹히셨으니―
어린 공화국(共和國) 오― 우리들의 가슴에 차 오는 꽃봉오리여 저 대담한 새벽처럼 서슴지 말고 밤새워 기다리는 거리로 어서 다가오소서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연륜(年輪)
무너지는 꽃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서른 나문 해야
구름같이 피려던 뜻은 날로 굳어 한 금 두 금 곱다랗게 감기는 연륜(年輪)
갈매기처럼 꼬리 덜며 산호(珊瑚) 핀 바다 바다에 나려앉은 섬으로 가자
비취빛 하늘 아래 피는 꽃은 맑기도 하리라 무너질 적에는 눈빛 파도에 적시우리
초라한 경력을 육지에 막은 다음 주름 잡히는 연륜(年輪)마저 끊어버리고 나도 또한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
춘추, 1936
김기림 시인 / 연애의 단면(斷面)
애인이여 당신이 나를 가지고 있다고 안심할 때 나는 당신의 밖에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의 속에 내가 있다고 하면 나는 한 덩어리 목탄에 불과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놓아 보내는 때 당신은 가장 많이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애인이여 나는 어린 제비인데 당신의 의지는 끝이 없는 밤입니다.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오늘은 악마의 것이나
문이 아니라 벽인 것 같다 바위가 아니면 벼래 또 밑 없는 골짜구니
길이 너무 험하여 두고 가는 무덤이 잦아 진달래와 두견새 울음소리 슬플 날 아직도 많을까 부다 그러나 지구는 부질없이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뭇 사라지는 것들의 망령인 것처럼 이즈러진 전차와 강아지와 거지가 악을 쓰며 쫓겨다니는 거리 모두가 헐벗고 춥고 배가 고파 악이 오른 찌푸린 거리 쓰레기 쌓인 골목을 돌아 열 스무 번 다시 일어나 가야 할 길
이 길을 돌아가야만 바다가 트인 평야로 나간다 한다
지구는 부질없이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아무리 그믐밤일지라도 저기 별이 있어 좋지 않으냐 장미와 무지개 가득 차 우리 가슴이 부풀어 좋지 않으냐
오늘은 악마의 것이나 내일은 우리의 것이다
새노래, 아문각, 1948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석 시인 / 삼호(三湖) 외 4편 (0) | 2019.09.23 |
---|---|
정지용 시인 / 인동차(忍冬茶) 외 4편 (0) | 2019.09.23 |
정지용 시인 / 카페·프란스 외 4편 (0) | 2019.09.22 |
김규동 시인 / 환상가로(幻想街路) 외 3편 (0) | 2019.09.22 |
김기림 시인 / 시론(詩論) 외 2편 (0) | 2019.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