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김기림 시인 / 어린 공화국(共和國)이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2.

김기림 시인 / 어린 공화국(共和國)이여

 

 

식은 화산 밑바닥에서

희미하게 나부끼던 작은 불길

말발굽 구르는 땅 아래서

수은처럼 떨리던 샘물

인제는 모란같이 피어나라 어린 공화국이여

 

그늘에 감춰온 마음의 재산

우리들의 오래인 꿈 어린 공화국이여

음산한 `근대'의 장렬(葬列)에서 빼앗은 기적

역사의 귀동자 어린 공화국이여

 

오― 명예도 지위도 부귀도 다 싫소

오직 그대 가는 길 멍에 밑 즐거운 노역(勞役)에 얽매어 주오

빛나는 공화국이여 그러고 안심하소서

젊은이 어깨에 그대 얹히셨으니―

 

어린 공화국(共和國)

오― 우리들의 가슴에 차 오는 꽃봉오리여

저 대담한 새벽처럼 서슴지 말고

밤새워 기다리는 거리로 어서 다가오소서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연륜(年輪)

 

 

무너지는 꽃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서른 나문 해야

 

구름같이 피려던 뜻은 날로 굳어

한 금 두 금 곱다랗게 감기는 연륜(年輪)

 

갈매기처럼 꼬리 덜며

산호(珊瑚) 핀 바다 바다에 나려앉은 섬으로 가자

 

비취빛 하늘 아래 피는 꽃은 맑기도 하리라

무너질 적에는 눈빛 파도에 적시우리

 

초라한 경력을 육지에 막은 다음

주름 잡히는 연륜(年輪)마저 끊어버리고

나도 또한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

 

춘추, 1936

 

 


 

 

김기림 시인 / 연애의 단면(斷面)

 

 

애인이여

당신이 나를 가지고 있다고 안심할 때 나는 당신의 밖에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의 속에 내가 있다고 하면 나는 한 덩어리 목탄에 불과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놓아 보내는 때 당신은 가장 많이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애인이여

나는 어린 제비인데 당신의 의지는 끝이 없는 밤입니다.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오늘은 악마의 것이나

 

 

문이 아니라 벽인 것 같다

바위가 아니면 벼래

또 밑 없는 골짜구니

 

길이 너무 험하여

두고 가는 무덤이 잦아

진달래와 두견새 울음소리 슬플 날 아직도 많을까 부다

그러나 지구는 부질없이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뭇 사라지는 것들의 망령인 것처럼

이즈러진 전차와 강아지와 거지가

악을 쓰며 쫓겨다니는 거리

모두가 헐벗고 춥고 배가 고파

악이 오른 찌푸린 거리

쓰레기 쌓인 골목을 돌아

열 스무 번 다시 일어나 가야 할 길

 

이 길을 돌아가야만

바다가 트인 평야로 나간다 한다

 

지구는 부질없이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아무리 그믐밤일지라도 저기 별이 있어 좋지 않으냐

장미와 무지개 가득 차 우리 가슴이 부풀어 좋지 않으냐

 

오늘은 악마의 것이나

내일은 우리의 것이다

 

새노래, 아문각, 1948

 

 


 

김기림[金起林, 1908. 5.11 ~?]시인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에서 출생.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대학을 거쳐, 도호쿠제국대학 영어영문과 졸업. 1930년대 초반에 《조선일보》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 1. 23) · 〈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學燈 창간호, 1931. 10.) ∙ 〈고대(苦待)〉(新東亞 창간호, 1931. 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하고, 주지주의에 관한 단상(斷想)인〈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 1. 27.)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  문학 활동은 九人會(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 이론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학사적 공적으로 남아 있음. 모더니즘 이론에 입각하여 창자고가 비평에서 두루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다소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도 했음.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됨. 대표 저서로는 시집으로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새노래』 등과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고,  비평 및 이론서로『문학개론』, 『시론』, 『시의 이해』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