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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정지용 시인 / 카페·프란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2.

정지용 시인 / 카페·프란스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롵[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 루바쉬카 : 러시아 남자들이 입는 블라우스 풍의 상의.

* 보헤미안 : 집시(Gypsy)나 사회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 페이브먼트: 포장도로.

* 패롯 : 앵무새.

* 울금향 :튤립(tulip).

 

({학조} 창간호, 1926.6)

 

 


 

 

정지용 시인 / 난초(蘭草)

 

 

난초잎은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난초잎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난초잎은

한밤에 여는 담은 입술이 있다.

 

난초잎은

별빛에 눈떴다 돌아 눕다.

 

난초잎은

드러난 팔굽이를 어쩌지 못한다.

 

난초잎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잎은

춥다.

 

({신생} 37호, 1932.12)

 

 


 

 

정지용 시인 / 구성동(九城洞)

 

 

골짝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黃昏)에

누리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청색지} 2호, 1938.8)

 

 


 

 

정지용 시인 / 장수산(長壽山) 1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더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 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벌목정정: 나무를 베는 소리가 '정정'함. '정정'은 의성어.

* 올연히 : 홀로 우뚝하게.

 

({문장} 2호, 1939.3)

 

 


 

 

정지용 시인 / 백록담(白鹿潭)

- 한라산 소묘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版)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렇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는 별들이 켜 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壻?)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尺)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 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윈 송아지는 움매 - 움매 -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風蘭)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 솨 -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덩쿨 기어간 흰돌배기 꼬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避)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이(石 )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을 색이며 취(醉)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어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祈禱)조차 잊었더니라.

 

({문장} 3호, 1939.4)

 

 


 

정지용[鄭芝溶, 1902.5.15 ~ 1950.9.25] 시인

1902년 충북 옥천 에서 출생. 휘문고보 재학 시절《서광》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는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음.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 해방이 되서는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알지 못하나 북한이 최근 발간한 조선대백과사전에 1950년 9월

25일 사망했다고기록되어 있음. 주요 저서로는 『정지용 시집』, 『백록담』, 『지용문학독본』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