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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기림 시인 / 봄은 전보도 안 치고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9.

김기림 시인 / 봄은 전보도 안 치고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말 없는 산허리를 기어오는

차소리

우루루루

오늘도 철교는 운다. 무엇을 우누.

 

글쎄 봄은 언제 온다는 전보도 없이 저 차를 타고 도적과 같이 왔구려

어머니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골짝에서 코고는 시냇물들을 불러 일으키면서…….

해는 지금 붉은 얼굴을 벙글거리며

사라지는 엷은 눈 위에 이별의 키쓰를 뿌리노라고

바쁘게 돌아다니오.

 

포풀라들은 파―란 연기를 뿜으면서

빨래와 같은 하―얀 오후의 방천에 늘어서서

실업쟁이처럼 담배를 피우오.

 

봄아

너는 언제 강가에서라도 만나서

나에게 이렇다는 약속을 한 일도 없건만

어쩐지 무엇을―굉장히 훌륭한 무엇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애서

 

나는 오늘도 괭이를 멘 채 돌아서서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말이 없는 산기슭을 기어오는 기차를 바라본다.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비

 

 

굳은 어둠의 장벽을 시름 없이 `노크'하는 비들의 가벼운 손과 손과 손과 손……

그는 `아스팔트'의 가슴 속에 오색(五色)의 감정(感情)을 기르며 온다.

 

대낮에 우리는 `아스팔트'에게 향하여

ꡒ예끼 둔한 자식 너도 또한 바위의 종류구나ꡓ 하고 비웃었다.

그렇지만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는

눈물에 어린 그 자식의 얼굴을 보렴

 

루비 에메랄드 싸파이어 호박(琥珀) 비취(翡翠) 야광주(夜光珠)……

`아스팔트'의 호수면(湖水面)에 녹아 내리는 네온싸인의 음악(音樂).

고양이의 눈을 가진 전차(電車)들은(대서양(大西洋)을 건너는 타이타닉호(號)처럼)

구원할 수 없는 희망(希望)을 파묻기 위하야 검은 추억(追憶)의 바다를 건너간다.

 

그들의 구조선(救助船)인 듯이

종이 우산(雨傘)에 맥없이 매달려

밤에게 이끌려 헤엄쳐 가는 어족(魚族)들

여자(女子)―

사나이―

아무도 구원(救援)을 찾지 않는다.

 

밤은 심해(深海)의 돌단(突端)에 좌초(坐礁)했다.

S O S O S

신호(信號)는 해상(海上)에서 지랄하나

어느 무전대(無電臺)도 문을 닫았다.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김기림 시인 / 산양(山羊)

 

 

홀로 자빠져

 

옛날에 옛날에 잊어버렸던 찬송가를 외워 보는 밤

 

산양(山羊)과 같이 나는 갑자기 무엇이고 믿고 싶다.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새 나라 송(頌)

 

 

거리로 마을로 산으로 골짜구니로

이어가는 전선은 새 나라의 신경

이름 없는 나루 외따른 동리일망정

빠진 곳 하나 없이 기름과 피

골고루 돌아 다사론 땅이 되라

 

어린 기사들 어서 자라나

굴뚝마다 우리들의 검은 꽃묶음

연기를 올리자

김빠진 공장마다 동력을 보내서

그대와 나 온 백성이 새 나라 키워 가자

 

산신과 살기와 염병이 함께 사는 비석이 흔한 마을에 모―터와

전기를 보내서

산신을 쫓고 마마를 몰아내자

기름 친 기계로 운명과 농장을 휘몰아 갈

희망과 자신과 힘을 보내자

 

용광로에 불을 켜라 새 나라의 심장에

철선을 뽑고 철근을 늘이고 철판을 피리자

세멘과 철과 희망 위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 가자

 

녹슬은 궤도에 우리들의 기관차 달리자

전쟁에 해어진 화차와 트럭에

벽돌을 싣자 세멘을 올리자

애매한 지배와 굴욕이 좀먹던 부락과 나루에

내 나라 굳은 터 다져 가자

 

새노래, 아문각, 1948

 

 


 

김기림[金起林, 1908. 5.11 ~?]시인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에서 출생.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대학을 거쳐, 도호쿠제국대학 영어영문과 졸업. 1930년대 초반에 《조선일보》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 1. 23) · 〈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學燈 창간호, 1931. 10.) ∙ 〈고대(苦待)〉(新東亞 창간호, 1931. 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하고, 주지주의에 관한 단상(斷想)인〈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 1. 27.)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  문학 활동은 九人會(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 이론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학사적 공적으로 남아 있음. 모더니즘 이론에 입각하여 창자고가 비평에서 두루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다소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도 했음.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됨. 대표 저서로는 시집으로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새노래』 등과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고,  비평 및 이론서로『문학개론』, 『시론』, 『시의 이해』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