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봄은 전보도 안 치고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말 없는 산허리를 기어오는 차소리 우루루루 오늘도 철교는 운다. 무엇을 우누.
글쎄 봄은 언제 온다는 전보도 없이 저 차를 타고 도적과 같이 왔구려 어머니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골짝에서 코고는 시냇물들을 불러 일으키면서……. 해는 지금 붉은 얼굴을 벙글거리며 사라지는 엷은 눈 위에 이별의 키쓰를 뿌리노라고 바쁘게 돌아다니오.
포풀라들은 파―란 연기를 뿜으면서 빨래와 같은 하―얀 오후의 방천에 늘어서서 실업쟁이처럼 담배를 피우오.
봄아 너는 언제 강가에서라도 만나서 나에게 이렇다는 약속을 한 일도 없건만 어쩐지 무엇을―굉장히 훌륭한 무엇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애서
나는 오늘도 괭이를 멘 채 돌아서서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말이 없는 산기슭을 기어오는 기차를 바라본다.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비
굳은 어둠의 장벽을 시름 없이 `노크'하는 비들의 가벼운 손과 손과 손과 손…… 그는 `아스팔트'의 가슴 속에 오색(五色)의 감정(感情)을 기르며 온다.
대낮에 우리는 `아스팔트'에게 향하여 ꡒ예끼 둔한 자식 너도 또한 바위의 종류구나ꡓ 하고 비웃었다. 그렇지만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는 눈물에 어린 그 자식의 얼굴을 보렴
루비 에메랄드 싸파이어 호박(琥珀) 비취(翡翠) 야광주(夜光珠)…… `아스팔트'의 호수면(湖水面)에 녹아 내리는 네온싸인의 음악(音樂). 고양이의 눈을 가진 전차(電車)들은(대서양(大西洋)을 건너는 타이타닉호(號)처럼) 구원할 수 없는 희망(希望)을 파묻기 위하야 검은 추억(追憶)의 바다를 건너간다.
그들의 구조선(救助船)인 듯이 종이 우산(雨傘)에 맥없이 매달려 밤에게 이끌려 헤엄쳐 가는 어족(魚族)들 여자(女子)― 사나이― 아무도 구원(救援)을 찾지 않는다.
밤은 심해(深海)의 돌단(突端)에 좌초(坐礁)했다. S O S O S 신호(信號)는 해상(海上)에서 지랄하나 어느 무전대(無電臺)도 문을 닫았다.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김기림 시인 / 산양(山羊)
홀로 자빠져
옛날에 옛날에 잊어버렸던 찬송가를 외워 보는 밤
산양(山羊)과 같이 나는 갑자기 무엇이고 믿고 싶다.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새 나라 송(頌)
거리로 마을로 산으로 골짜구니로 이어가는 전선은 새 나라의 신경 이름 없는 나루 외따른 동리일망정 빠진 곳 하나 없이 기름과 피 골고루 돌아 다사론 땅이 되라
어린 기사들 어서 자라나 굴뚝마다 우리들의 검은 꽃묶음 연기를 올리자 김빠진 공장마다 동력을 보내서 그대와 나 온 백성이 새 나라 키워 가자
산신과 살기와 염병이 함께 사는 비석이 흔한 마을에 모―터와 전기를 보내서 산신을 쫓고 마마를 몰아내자 기름 친 기계로 운명과 농장을 휘몰아 갈 희망과 자신과 힘을 보내자
용광로에 불을 켜라 새 나라의 심장에 철선을 뽑고 철근을 늘이고 철판을 피리자 세멘과 철과 희망 위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 가자
녹슬은 궤도에 우리들의 기관차 달리자 전쟁에 해어진 화차와 트럭에 벽돌을 싣자 세멘을 올리자 애매한 지배와 굴욕이 좀먹던 부락과 나루에 내 나라 굳은 터 다져 가자
새노래, 아문각,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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