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두견새
어머니와 누이들 모르는 아닌 밤중 역사와 세계의 눈을 가려 가면서 큰 일을 저질렀느니라 별과 천사들 굽어보며 소름쳤느니라
뾰고 흰 손길을 끌려 송이송이 꽃봉오리 검은 화차에 실려 구름과 수풀과 바다를 돌아 몰려가던 날 아무도 말려 주는 이 없어 어머니만 발을 구르셨느니라
눈사부랭이에 맺히는 이슬 방울방울 그 아래 몸 던질 떳떳한 깃발과 잃어버린 조국의 모습을 찾으며 이적(夷狄)의 방언으로 노래 부르며 떠났느니라
분명 뜻하지 않은 기적이었느니라 흩어져 쓰러지는 이리떼 아구리와 불바다에서 겨우 빼앗아 돌아온 몇 아니 남은 목숨 아무렴 횡재이매 새 나라에 긴히 바치겠노라 하였느니라
기다리시는 어머니에게로 진작 돌아 못 갔음은 인제 오실 듯 오실 듯만 싶은 새 나라 맞으려 함이라 아―진정 늦었느니라 새 나라 오심이여 차라리 어머니에게로 가기만 못하였느니라
젊은이는 나라의 꽃이요 보배어니 젊은이를 쏘지 말라 쏘아서는 못 쓰니니라 어디서 어머니가 노려보시느니라 새 나라는 정녕 꾸짖으리라
그날 어머니는 무서운 꿈 소스라쳐 깨셨으리라 별과 천사들 꼴을 찡기며 고개 돌렸느니라 오― 젊은이들 모두 이렇게 괴로운데 새 나라 오심이 어찌 이리 더디시뇨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만세(萬歲)소리
하도 억울하여 부르는 소리 피 섞인 소리가 만세였다 총뿌리 앞에서 칼자욱에서 채찍 아래서 터져 나오는 민족의 소리가 만세였다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어 그저 부르는 소리가 만세였다
눌리다 눌리다 하도 기뻐 어안이 벙벙하여 그저 터져 나온 소리도 만세였다
만세는 손을 들어 함께 부르자 만세는 자유를 달라는 소리 꿈이 왔다는 소리 못 견디겠다는 소리 다시 일어난다는 소리 네 소리도 내 소리도 아닌 우리들 모두의 소리
민족과 역사와 원한과 소원을 한데 묶은 터질 듯 함축이 너무 무거워 걷잡을 수 없는 소리 폭죽처럼 별과 구름 사이에 퉁기는 소리였다
새노래, 아문각, 1948
김기림 시인 / 모두들 돌아와 있고나
오래 눌렸던 소리 뭉쳐 동포와 세계에 외치노니 민족의 소리고저 등불이고저 역사의 별이고저 여기 다시 우리들 모두 돌아와 있노라. 눈부시는 월계관은 우리들 본시 바라지도 않은 것 찬란한 자유의 새 나라 첩첩한 가시덤불 저편에 아직도 머니 우리들 가시관 달게 쓰고 새벽 서릿길 즐거이 걸어가리.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못
모―든 빛나는 것 아롱진 것을 빨아 버리고 못은 아닌 밤중 지친 동자(瞳子)처럼 눈을 감았다.
못은 수풀 한복판에 뱀처럼 서렸다 뭇 호화로운 것 찬란한 것을 녹여 삼키고
스스로 제 침묵에 놀라 소름친다 밑 모를 맑음에 저도 몰래 으슬거린다
휩쓰는 어둠 속에서 날[刃]처럼 흘김은 빛과 빛깔이 녹아 엉키다 못해 식은 때문이다
바람에 금이 가고 빗발에 뚫렸다가도 상한 곳 하나 없이 먼동을 바라본다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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