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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기림 시인 / 두견새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7.

김기림 시인 / 두견새

 

 

어머니와 누이들 모르는 아닌 밤중

역사와 세계의 눈을 가려 가면서

큰 일을 저질렀느니라

별과 천사들 굽어보며 소름쳤느니라

 

뾰고 흰 손길을 끌려

송이송이 꽃봉오리 검은 화차에 실려

구름과 수풀과 바다를 돌아 몰려가던 날

아무도 말려 주는 이 없어 어머니만 발을 구르셨느니라

 

눈사부랭이에 맺히는 이슬 방울방울

그 아래 몸 던질 떳떳한 깃발과

잃어버린 조국의 모습을 찾으며

이적(夷狄)의 방언으로 노래 부르며 떠났느니라

 

분명 뜻하지 않은 기적이었느니라

흩어져 쓰러지는 이리떼 아구리와 불바다에서

겨우 빼앗아 돌아온 몇 아니 남은 목숨

아무렴 횡재이매 새 나라에 긴히 바치겠노라 하였느니라

 

기다리시는 어머니에게로 진작 돌아 못 갔음은

인제 오실 듯 오실 듯만 싶은 새 나라 맞으려 함이라

아―진정 늦었느니라 새 나라 오심이여

차라리 어머니에게로 가기만 못하였느니라

 

젊은이는 나라의 꽃이요 보배어니

젊은이를 쏘지 말라 쏘아서는 못 쓰니니라

어디서 어머니가 노려보시느니라

새 나라는 정녕 꾸짖으리라

 

그날 어머니는 무서운 꿈 소스라쳐 깨셨으리라

별과 천사들 꼴을 찡기며 고개 돌렸느니라

오― 젊은이들 모두 이렇게 괴로운데

새 나라 오심이 어찌 이리 더디시뇨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만세(萬歲)소리

 

 

하도 억울하여

부르는 소리 피 섞인 소리가

만세였다

총뿌리 앞에서 칼자욱에서 채찍 아래서

터져 나오는 민족의 소리가

만세였다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어

그저 부르는 소리가

만세였다

 

눌리다 눌리다

하도 기뻐 어안이 벙벙하여

그저 터져 나온 소리도

만세였다

 

만세는 손을 들어 함께 부르자

만세는

자유를 달라는 소리

꿈이 왔다는 소리

못 견디겠다는 소리

다시 일어난다는 소리

네 소리도 내 소리도 아닌

우리들 모두의 소리

 

민족과 역사와 원한과 소원을 한데 묶은

터질 듯 함축이 너무 무거워

걷잡을 수 없는 소리

폭죽처럼

별과 구름 사이에 퉁기는 소리였다

 

새노래, 아문각, 1948

 

 


 

 

김기림 시인 / 모두들 돌아와 있고나

 

 

오래 눌렸던 소리 뭉쳐

동포와 세계에 외치노니

민족의 소리고저 등불이고저

역사의 별이고저

여기 다시 우리들 모두 돌아와 있노라.

눈부시는 월계관은 우리들 본시 바라지도 않은 것

찬란한 자유의 새 나라

첩첩한 가시덤불 저편에 아직도 머니

우리들 가시관 달게 쓰고

새벽 서릿길 즐거이 걸어가리.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못

 

 

모―든 빛나는 것 아롱진 것을 빨아 버리고

못은 아닌 밤중 지친 동자(瞳子)처럼 눈을 감았다.

 

못은 수풀 한복판에 뱀처럼 서렸다

뭇 호화로운 것 찬란한 것을 녹여 삼키고

 

스스로 제 침묵에 놀라 소름친다

밑 모를 맑음에 저도 몰래 으슬거린다

 

휩쓰는 어둠 속에서 날[刃]처럼 흘김은

빛과 빛깔이 녹아 엉키다 못해 식은 때문이다

 

바람에 금이 가고 빗발에 뚫렸다가도

상한 곳 하나 없이 먼동을 바라본다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金起林, 1908. 5.11 ~?]시인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에서 출생.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대학을 거쳐, 도호쿠제국대학 영어영문과 졸업. 1930년대 초반에 《조선일보》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 1. 23) · 〈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學燈 창간호, 1931. 10.) ∙ 〈고대(苦待)〉(新東亞 창간호, 1931. 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하고, 주지주의에 관한 단상(斷想)인〈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 1. 27.)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  문학 활동은 九人會(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 이론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학사적 공적으로 남아 있음. 모더니즘 이론에 입각하여 창자고가 비평에서 두루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다소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도 했음.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됨. 대표 저서로는 시집으로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새노래』 등과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고,  비평 및 이론서로『문학개론』, 『시론』, 『시의 이해』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