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 죽음
1
죽음은 갈 것이다. 어딘가 거기 초록(草綠)의 샘터에 빛 뿌리며 서있는 황금(黃金)의 나무……
죽음은 갈 것이다. 바람도 나무도 잠든 고요한 한밤에 죽음이 가고 있는 경허(敬허)한 발소리를 너는 들을 것이다.
2
죽음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가을 어느 날 네가 걷고 있는 잎진 가로수(街路樹)곁을 돌아오는 죽음의 풋풋하고 의젓한 무명(無名)의 그 얼굴…… 죽음은 너를 향하여 미지(未知)의 손을 흔들 것이다.
죽음은 네 속에서 다시 숨쉬며 자라 갈 것이다.
꽃의 소묘, 백자사, 1959
김춘수 시인 / 수련별곡(水蓮別曲)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 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 땐가 다시 한 번 낙화(落花)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 번 죽어야 한다면 죽음이 그대 눈시울을 검은 손바닥으로 꼭 한 번 남김없이 덮어야 한다면 살아서 그대 이고 받든 가도가도 끝이 없던 그대 이승의 하늘, 그 떫디떫던 눈웃음을 누가 가지리오?
김춘수 시선, 정음사, 1976
김춘수 시인 / 봄이 와서 2
꼬부라진 샛길을 빠져나와 또 하나 꼬부라진 샛길을 따라가면 뜻밖에도 타작마당만한 공지(空地)가 나오고 넝마더미가 널려 있고 그런 곳에 장다리꽃 너댓 송이 피어 있더라. 늙은 산(山)이 하나 낮달을 안고 누워 있고 눈썹이 없는 아이가 눈썹이 없는 아이를 울리고 있더라. 언제까지나 울리고 있더라.
남천(南天), 근역서재, 1977
김춘수 시인 / 밤의 시(詩)
왜 저것들은 소리가 없는가 집이며 나무며 산(山)이며 바다며 왜 저것들은 죄(罪)지은 듯 소리가 없는가. 바람이 죽고 물소리가 가고 별이 못 박힌 뒤에는 나뿐이다 어디를 봐도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이 천지간(天地間)에 숨쉬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목메인 둣 누를 불러볼 수도 없다 부르면 눈물이 작은 호수(湖水)만큼 쏟아질 것만 같다. ― 이 시간(時間) 집과 나무와 산(山)과 바다와 나는 왜 이렇게도 약(弱)하고 가난한가 밤이여 나보다도 외로운 눈을 가진 밤이여.
늪, 문예사,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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