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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춘수 시인 / 죽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7.

김춘수 시인 / 죽음

 

 

1

 

죽음은 갈 것이다.

어딘가 거기

초록(草綠)의 샘터에

빛 뿌리며 서있는 황금(黃金)의 나무……

 

죽음은 갈 것이다.

바람도 나무도 잠든

고요한 한밤에

죽음이 가고 있는 경허(敬허)한 발소리를

너는 들을 것이다.

 

2

 

죽음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가을 어느 날

네가 걷고 있는 잎진 가로수(街路樹)곁을

돌아오는 죽음의

풋풋하고 의젓한 무명(無名)의 그 얼굴……

죽음은 너를 향하여

미지(未知)의 손을 흔들 것이다.

 

죽음은

네 속에서 다시

숨쉬며 자라 갈 것이다.


꽃의 소묘, 백자사, 1959

 

 


 

 

김춘수 시인 / 수련별곡(水蓮別曲)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 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 땐가 다시 한 번

낙화(落花)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 번 죽어야 한다면

죽음이 그대 눈시울을

검은 손바닥으로 꼭 한 번

남김없이 덮어야 한다면

살아서 그대 이고 받든

가도가도 끝이 없던 그대 이승의 하늘,

그 떫디떫던 눈웃음을 누가 가지리오?


김춘수 시선, 정음사, 1976

 

 


 

 

김춘수 시인 / 봄이 와서 2

 

 

꼬부라진 샛길을 빠져나와

또 하나 꼬부라진 샛길을 따라가면

뜻밖에도

타작마당만한 공지(空地)가 나오고

넝마더미가 널려 있고

그런 곳에

장다리꽃 너댓 송이 피어 있더라.

늙은 산(山)이 하나

낮달을 안고 누워 있고

눈썹이 없는 아이가 눈썹이 없는 아이를

울리고 있더라.

언제까지나 울리고 있더라.


남천(南天), 근역서재, 1977

 

 


 

 

김춘수 시인 / 밤의 시(詩)

 

 

왜 저것들은 소리가 없는가

집이며 나무며 산(山)이며 바다며

왜 저것들은

죄(罪)지은 듯 소리가 없는가.

바람이 죽고

물소리가 가고

별이 못 박힌 뒤에는

나뿐이다 어디를 봐도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이 천지간(天地間)에 숨쉬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목메인 둣

누를 불러볼 수도 없다

부르면 눈물이

작은 호수(湖水)만큼 쏟아질 것만 같다.

― 이 시간(時間)

집과 나무와 산(山)과 바다와 나는

왜 이렇게도 약(弱)하고 가난한가

밤이여

나보다도 외로운 눈을 가진 밤이여.


늪, 문예사, 1950

 

 


 

김춘수 시인(金春洙 1922년-2004년)

 

아명은 대여(大.餘). 1922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충무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교 예술학부에서 공부했으나, 1942년에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판하여 1943년에 퇴학당했다. 1946년에 귀국하여 1951년까지 통영중학교, 마산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1946년에 시 <애가>를 발표하면서 등단, 이 때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1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교단에 들어선 그는 1964년부터 1978년까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영남대학교의 문리대 학장을 지내다가 1981년에 정계로 들어오며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시인과 평론가로서 활동한다. 1948년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 출간을 시작으로 시 <산악(山嶽)>, <사(蛇)>, <기(旗)>, <모나리자에게>,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을 발표하였다. 다른 시집으로는 <늪>,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타령조 기타>, <처용(處容)>, <남천>, <비에 젖은 달> 등이 있다. 1958년에 한국시인협회상, 1959년에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