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감상풍경(感傷風景)
순아 이 들이 너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말을 차마 이 들의 귀에 들려 주지 말아라. 네 눈을 즐겁게 못하는 슬픈 벗 `포풀라'의 호릿한 몸짓은 오늘도 방천(防川)에서 떨고 있다. 가느다란 탄식(歎息)처럼……
아침의 정적(靜寂)을 싸고 있는 무거운 안개 속에서 그날 너의 노래는 시냇물을 비웃으며 조롱하였다. 소들이 마을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음메― 음메― 울던 저녁에 너는 나물 캐던 바구니를 옆에 끼고서 푸른 보리밭 사이 오솔길을 배아미처럼 걸어 오더라.
기차(汽車) 소리가 죽어 버린 뒤의 검은 들 위에서 오늘 나는 삐죽한 광이 끝으로 두터운 안개빨을 함부로 찢어 준다. 이윽고 흰 배아미처럼 적막(寂寞)하게 나는 돌아갈게다.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김기림 시인 / 겨울의 노래
망또처럼 추근추근한 습지기로니 왜 이다지야 태양이 그리울까 의사는 처방을 단념하고 돌아갔다지요 아니요 나는 인생이 더 노엽지 않습니다
여행도 했습니다 몇 낱 서투른 러브씬―무척 우습습니다 인조견을 두르고 환(還)고향하는 어사또(御史道)님도 있습디다 저마다 훈장처럼 오만합니다 사뭇 키가 큽니다 남들은 참말로 노래를 부를 줄 아나배
갈바람 속에 우두커니 섰는 벌거벗은 허수아비들 어느 철없는 가마귀가 무서워할까요 저런 연빛 하늘에도 별이 뜰 리 있나 장미가 피지 않는 하늘에 별이 살 리 있나
바람이 떼를 지어 강가에서 우짖는 밤은 절망이 혼자 밤새도록 내 친한 벗이었습니다 마지막 별이 흘러가도 아무도 소름치지 않습니다 집마다 새벽을 믿지 않는 완고한 창들이 잠겨 있습니다
육천년 메마른 사상의 사막에서는 오늘밤도 희미한 신화의 불길들이 음산한 회의의 바람에 불려 깜박거립니다
그러나 사월이 오면 나도 이 추근추근한 계절과도 작별해야 하겠습니다 습지에 자란 검은 생각의 잡초들을 불사뤄 버리고 태양이 있는 바닷가로 나려가겠습니다 거기서 벌거벗은 신들과 건강한 영웅들을 만나겠습니다.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곡(哭) 백범 선생(白凡先生)
살 깎고 피 뿌린 40년 돌아온 보람 금도 보석도 아닌 단 한 알의 탄환
꿈에도 못 잊는 조국통일의 산 생리를 파헤치는 눈도 귀도 없는 몽매한 물리(物理)여!
동으로 동으로 목말라 찾던 어머니인 땅이 인제사 바치는 성찬은 이뿐이던가
저주받을세 옳은 민족이로다 스스로 제 위대한 혈육에 아로새기는 박해가 어찌 이처럼 숙련하냐
위태로운 때 큰 기둥 뒤따라 꺾어짐 민족의 내일에 비바람 설레는 우짖음 자꾸만 귀에 자욱하구나
눈물을 아껴 둬 무엇하랴 젊은 가슴마다 기념탑 또 하나 무너지는 소리
옳은 꿈 사랑하는 이어든 멈춰서 가슴 쏟아 여기 통곡하자
눈물 속 어리는 끝없는 조국의 어여쁜 얼굴 저마다 쳐다보며 꺼꾸러지며 그를 넘어 또다시 일어나 가리
새노래, 아문각,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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