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
바빌론으로 바빌론으로 작은 여자의 마음이 움직인다. 개나리의 얼굴이 여린 볕을 향할 때……. 바빌론으로 간 `미미'에게서 복숭아꽃 봉투가 날아왔다. 그날부터 아내의 마음은 시들어져 썼다가 찢어버린 편지만 쌓여 간다. 아내여, 작은 마음이여
너의 날아가는 자유(自由)의 날개를 나는 막지 않는다. 호을로 쌓아 놓은 좁은 성벽(城壁)의 문을 닫고 돌아서는 나의 외로움은 돌아봄 없이 너는 가거라.
아내여 나는 안다. 너의 작은 마음이 병들어 있음을……. 동트지도 않은 내일의 창머리에 매달리는 너의 얼굴 위에 새벽을 기다리는 작은 불안을 나는 본다.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 가거라. 너는 내일(來日)을 가져라. 밝아 가는 새벽을 가져라.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가을의 과수원
어린 곡예사인 별들은 끝이 없는 암흑의 그물 속으로 수없이 꼬리를 물고 떨어집니다. 포풀라의 나체는 푸른 저고리를 벗기우고서 방천 위에서 느껴 웁니다. 과수원 속에서는 임금(林檎)나무들이 젊은 환자와 같이 몸을 부르르 떱니다. 무덤을 찾아다니는 잎 잎 잎……
서(西) 남(南) 서(西)
바람은 아마 이 방향에 있나 봅니다. 그는 진둥나무의 검은 머리채를 찢으며 아킬러쓰의 다리를 가지고 쫓겨가는 별들 속을 달려갑니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찾는 광란한 기적소리가 지구의 모―든 철요면(凸凹面)을 굴러갑니다. SOS․SOS. 검은 바다여 너는 당돌한 한 방울의 기선마저 녹여 버리려는 의지를 버리지 못하느냐? 이윽고 아침이 되면 농부들은 수없이 떨어진 별들의 슬픈 시체를 주우려 과일밭으로 나갑니다. 그러고 그 기적적인 과일들을 수레에 싣고는 저 오래인 동방의 시장 바그다드로 끌고 갑니다.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가을의 태양(太陽)은 플라티나... 원제 : 가을의 태양(太陽)은 플라티나의 연미복(燕尾服)을 입고
가을의 태양은 게으른 화가입니다.
거리 거리에 머리 숙이고 마주선 벽돌집 사이에 창백한 꿈의 그림자를 그리며 다니는……
쇼윈도우의 마네킹 인형은 홑옷을 벗기우고서 셀룰로이드의 눈동자가 이슬과 같이 슬픕니다.
실업자의 그림자는 공원의 연못가의 갈대에 의지하여 살찐 금붕어를 호리고 있습니다.
가을의 태양(太陽)은 플라티나의 연미복을 입고서 피 빠진 하늘의 얼굴을 산보하는 침묵한 화가입니다.
기상도, (자가본),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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