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 진이(眞伊)의 체온(體溫)
싸락눈이 날리다 멎은 일요일(日曜日). 북한산성(北漢山城)길 돌 틈에 피어난 들 국화(菊花) 한송일 구경하고 오다가, 샘터에서 살얼음을 쪼개고 물을 마시는데 눈동자가, 그 깊고 먼 눈동자가 이 찬 겨울 천지 사이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더라.
또 어느날이었던가, 광화문(光化門) 네거리를 거닐다 친구를 만나 손목을 잡으니 자네 손이 왜 이리 찬가 묻기, 빌딩만 높아가고 물가만 높아가고 하니 아마 그런가베 했더니 지나가던 낯선 여인(女人)이 여우 목도리 속에서 웃더라.
나에게도 고향(故鄕)은 있었던가. 은실 금실 휘황한 명동(明洞)이 아니어도, 입동만 지나면 해도 노루꼬리만큼씩은 길어진다는데 금강(錦江) 연안 양지쪽 흙마루에서 새 순 돋은 무우를 다듬고 계실 눈 어두운 어머님을 위해 이 세모(歲暮)엔 무엇을 마련해 보아야 한단 말인가.
문경 새재 산막(山幕) 곁에 흰 떡 구워 팔던 그 유난히 눈이 맑던 피난소녀(避難少女)도 지금쯤은 누구 그늘에선가 지쳐 있을 것.
꿀꿀이죽을 안고 나오다 총에 쓰러진 소년(少年), 그 소년(少年)의 염원(念願)이 멎어있는 그 철조망 동산에도 오늘 해는 또 얼마나 다숩게 그옛날 목홧단 말리던 아낙네 입술들을 속삭여 빛나고 있을 것인가.
어디메선가 세모(歲暮)의 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화담(花潭)선생의 겨울을 그리워 열두폭 치마 아무려 여미던 진이(眞伊)의 체온으로, 그 낭만들이 뿌려진 판문점(板門店) 근처에도 아직 경의선(京義線)은 소생(蘇生)되지 못했지만 서서히 서리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한강(漢江) 기슭이라도 산책하련다. 이 세모(歲暮)에 어느날이었던가. 비밀의 연인(戀人)끼리 인천(仁川)바다언덕 잔디밭에 불을 질러놓고 오바깃 세워 팔짱끼던 그 말없던 표정들처럼.
나도 먼 벌판을 조용히 산책이나 하며 김서린 한 해 상처들이나 생각해 보아야지…….
동아일보, 1964. 12. 19
신동엽 시인 / 창(窓)가에서
창가에 서면 앞집 담 너머로 버들닢 푸르다. 뉘집 굴뚝에선가 저녁 짓는 연기 퍼져 오고, 이슬비는 온 종일 도시(都市) 위 절름거리고 있다. 석간(夕刊)을 돌리는 소년(少年)은 지금쯤 어느 골목장이를 서둘고 있을까.
바람에 잘못 쫓긴 이슬 방울 하나가 내 코 잔등에 와 앉는다. 부연 안개 너머로 남산(南山) 전등 불빛이 빛무리져 보인다. 무얼 보내신 이가 있을까. 그리고 무언 정말 땅으로만 가는 것일까. 정말 땅은 우리 모두 의 열반일까.
창가에 서면 두부 한 모 사가지고 종종걸음치는 아낙의 치마자락이 나의 먼 시간(時間)속으로 묻힌다.
자유공론, 1967. 4
신동엽 시인 / 향(香)아
향(香)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찍스런 웃음들 들려 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夕陽)……
구슬처럼 흘러가는 내ㅅ물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傳說)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눈동자를 보아라 향(香)아 회올리는 무지개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
철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끈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故鄕)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
향(香)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그만 내자
들국화(菊花)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未開地)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밤 비단치마를 나부끼며 떼지어 춤추던 전설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내ㅅ물 구비치는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
조선일보, 1959. 11. 9
신동엽 시인 /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그렇지요, 좁기 때문이에요. 높아만 지세요, 온 누리 보일 거에요. 잡답(雜踏) 속 있으면 보이는 건 그것뿐이에요. 하늘 푸르러도 넌출 뿌리 속 헤어나기란 두 눈 먼 개미처럼 어려운 일일 거에요.
보세요. 이마끼리 맞부딪다 죽어가는 거야요. 여름날 홍수 쓸려 죄없는 백성들은 발버둥쳐 갔어요. 높아만 보세요, 온 역사 보일 거에요. 이 빠진 고목(古木) 몇 그루 거미집 쳐 있을 거구요.
하면 당신 살던 고장은 지저분한 잡초밭, 아랫도리 붙어 살던 쓸쓸한 그늘밭이었음을 눈뜰 거에요.
그렇지요, 좀만 더 높아 보세요. 쏟아지는 햇빛 검깊은 하늘밭 부딪칠 거에요. 하면 영(嶺) 너머 들길 보세요. 전혀 잊혀진 그쪽 황무지에서 노래치며 돋아나고 있을 싹수 좋은 둥구나무 새끼들을 발견할 거에요.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늦지 않아요. 이슬 열린 아직 새벽 벌판이에요.
서울일일신문(日日新聞), 1961.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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