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 정본(定本) 문화사대계(文化史大系)
오랜 빙하기(氷河期)의 얼음장을 뚫고 연연히 목숨 이어 그 거룩한 씨를 몸지녀 오느라고 뱀은 도사리는 긴 짐승 냉혈(冷血)이 좋아져야 했던 것이다.
몇만년 날이 풀리고, 흙을 구경한 파충(爬蟲)들은 구석진 한지에서 풀려 나온 털가진 짐승들을 발견하고 쪽쪽이 역량을 다하여 취식하며 취식당했다.
어느날, 흙굴 속서 털사람이 털곰과 털숲 업쓸고 있을 때, 그 넘편 골짜기 양지밭에선 긴 긴 물건이 암 사람의 알 몸에 붙어 있었다.
얼음 땅, 이혈(異血) 다스운 피를 맛본 냉혈은 다음 날도 또 다음 꽃 나절도 암 사람의 몸에 감겨 애무 흡혈(吸血)하고 있었으나 천하, 욕(慾)을 이루 끝 새키지 못한 숫뱀은 마침내 요독을 악으로 다하여 앙! 앙! 그 예쁜 몸알을 물어 죽여 버리고야 말았다.
암살진 피부는 대대손손(代代孫孫) 지상(地上)에 살아 징글맞게 미끈덩한 눈물겨운 그 압축(壓縮)의 황홀을. 내밀히 기어오르게 하려 하여도 냉혈 그는 능글맞은 몸짓으로 천연 미끄러 빠져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오랜 세상, 그리하여 뱀과 사람과의 꽃다운 이야기는 인간 사는 사회 어델 가나 끊일 줄 몰라 하더니, 오늘도 암살과 숫살은 원인 모를 열에 떠 거리와 공원(公園)으로 기어나갔다가 뱀 한 마리씩을 짓니까려 뭉개고야 숨이 가빠 돌아왔다.
내 마음 미치게 불질로 놓고 슬슬 빠져나간 배반자야. 내 암살 꼬여내어 징그런 짓 배워준 소름칠 이것아. 소름칠 이눔아.
이들 짐승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인정(人情)은 오늘 없어도, 내일날 그들의 욕정장(欲情場)에 능구리는 또아리 틀어 그 몸짓과 의상(衣裳)은 꽃구리를 닮아 갈지이니.
이는 다만 또 다음 빙하기(氷河期)를 남몰래 예약해둔 뱀과 사람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뜻함일지니라.
세계, 1960년 6월
신동엽 시인 / 종로오가(鍾路五街)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 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딩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거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동서춘추(東西春秋), 196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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