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 여름 고개
산고개 가는 길에 개미는 집을 짓고 움막도 심심해라
풋보리 마을선 누더기 냄새 살구나무 마을선 시절 모를 졸음
산고개 가는 길엔 솔이라도 씹어야지 할멈이라도 반겨야지
신동아, 1968. 8
신동엽 시인 / 원추리*
톡 톡 투드려 보았다.
숲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투드리면 먼 상고(上古)까장 울린다.
춤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타작 소리.
톡 톡 투드려 보았다.
삼한(三韓) 적 맑은 대가리.
산 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
*: 원제(原題)는 `꽃대가리'임
아사녀(阿斯女), 문학사, 1963
신동엽 시인 /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
어두운 대지(大地) 한 가닥 서기(瑞氣) 있어, 무릎 모두우고 일어 앉는 그림자. 헝클진 앞가슴 아무려 여미며 비녀는 입에, 두 손은 머릴 간 조롱이고, 동 트는 대지 계곡(溪谷)과 들녘에 한 올기 맨발 번 육혼(肉魂)은 살어.
태백(太白)줄기 고을 고을마다 강남(江南)제비 돌아와 흙 물어 나르면, 산이랑 들이랑 내랑 이뤄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 산천(山川)인데……
맛동 마을 농사집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딩굴 벙굴 자라서,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걷워딜 때 걷워딜듯, 이웃 말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짤랑 꽃가마도 타 보고, 환갑(還甲) 잔치엔 아들 손주 큰 절이나 받으면서 한 평생 살다가 묻혀 가도록 내버려나 주었던들.
흙에서 나와 흙에로 돌아가며. 영원회귀(永遠回歸) 운운 이야기는 없어도 햇빛을 서로 누려 번갈아 태어 나고. 자넨 저 만큼, 이낸 이 만큼, 서로 이물을 두어 따 위에 눕고. 사람과 사람과의 중복(重複)됨이 없이, 흙에서 솟아 흙에로 흩어져 돌아갔을,
인간기생(人間寄生)을 모를 사람들.
산정(山頂)의 제왕(帝王)……. 얼마나 좋은가.
그리고 나의 발 아래 저렇게 많이 산의 경사(傾斜)를 좇아 무진한 돌들이 천골 만색으로 붙어 있지 아니한가.
대지(大地)에는 지열(地熱)도 영천(靈泉)도 솟는다 하데 마는, 짐(朕)이 디디고 있는 이 산은 인육(人肉)으로 구축(構築)된 말 하자면 기생탑(寄生塔)일세.
해서 그들의 등가죽엔 강물이 흐르지 않는단 말야.
헌데 그런 건 그렇고. 우스운 이야기는 따에 붙어 사는 그 버섯들의 살림살이 말일세.
그들이야말로 이런 따위, 저희끼리 눈 감고 아웅하는 격, 왕궁(王宮)과 통치권엔 아랑곳 없으니까.
2차대전 저물어 가기 얼마 전의 이야길세. 두만강변(豆滿江邊) 어느 촌락(村落)을 지남 길 한 할아버지로부턴 이런 이야길 들은 일이 있네.
우리하고 글쎄 무슨 상관이 있단 말요. 왜 자꾸 와 귀찮게 찝쩍이냐 말요. 내 멀쩡한 사지(四肢)로 땅을 일궈서 강냉이, 고구마, 조를 추수하고 옆 마을 해삼(海蔘)장 점북과 바꿔 오구, 시집 보내구, 장가 보내구, 잘 사는데 글쎄 뭘 어떻거겠단 말이랑요.
그러나, 그들의 마을에도, 등가죽에도, 방방곡곡 벅어 온 낙지의 발은 악착스레 착근(着根)하여 수렁이 되었나니. 그렇다 오천년간 만주의(萬主義)는 백성의 허가 얻은 아름다운 도적이었나?
조선일보, 195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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