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 계단
거기 중간쯤 어디서 귀뚜라미가 실솔이 되는 것을 보았다 부르르 수염이 떨고 있었다 그때가 물론 가을이다 끄트머리 계단 하나가 하늘에 가 있었다
김춘수 시인 / 나의 하느님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타령조(打令調).기타(其他), 문화출판사, 1969
김춘수 시인 / 네가 가던 그 날은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 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김춘수 시인 / 노새를 타고
기러기는 울지마, 기러기는 날면서 끼루룩 끼루룩 울지 마, 바람은 죽어서 마을을 하나 넘고 둘 넘어 가지 마,멀리 멀리 가지 마, 왜 이미 옛날에 그런 말을 했을까. 도요새는 울지 마, 달맞이꽃은 여름밤에만 피지 마, 언뜻언뜻 살아나는 풀무의 불꽃, 풀무의 파란 불꽃.
김춘수 시인 / 능금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祝祭)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餘韻)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時時刻刻)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愛撫)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微笑)를 따라가며는 세월(歲月)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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