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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동엽 시인 / 여름 고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0.

신동엽 시인 / 여름 고개

 

 

산고개 가는 길에

개미는 집을 짓고

움막도 심심해라

 

풋보리 마을선

누더기 냄새

살구나무 마을선

시절 모를 졸음

 

산고개 가는 길엔

솔이라도 씹어야지

할멈이라도 반겨야지

 

신동아, 1968. 8

 

 


 

 

신동엽 시인 / 원추리*

 

 

톡 톡

투드려 보았다.

 

숲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투드리면

먼 상고(上古)까장 울린다.

 

춤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타작 소리.

 

톡 톡

투드려 보았다.

 

삼한(三韓) 적

맑은 대가리.

 

산 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

 

*: 원제(原題)는 `꽃대가리'임

 

아사녀(阿斯女), 문학사, 1963

 

 


 

 

신동엽 시인 /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

 

 

어두운 대지(大地) 한 가닥 서기(瑞氣) 있어, 무릎 모두우고 일어 앉는 그림자. 헝클진 앞가슴 아무려 여미며 비녀는 입에, 두 손은 머릴 간 조롱이고, 동 트는 대지 계곡(溪谷)과 들녘에 한 올기 맨발 번 육혼(肉魂)은 살어.

 

태백(太白)줄기 고을 고을마다 강남(江南)제비 돌아와

흙 물어 나르면, 산이랑 들이랑 내랑 이뤄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 산천(山川)인데……

 

맛동 마을 농사집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딩굴 벙굴 자라서,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걷워딜 때 걷워딜듯, 이웃 말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짤랑 꽃가마도 타 보고,

환갑(還甲) 잔치엔 아들 손주 큰 절이나 받으면서

한 평생 살다가 묻혀 가도록 내버려나 주었던들.

 

흙에서 나와

흙에로 돌아가며.

영원회귀(永遠回歸) 운운 이야기는 없어도

햇빛을 서로 누려 번갈아 태어 나고.

자넨 저 만큼,

이낸 이 만큼,

서로 이물을 두어

따 위에 눕고.

사람과 사람과의

중복(重複)됨이 없이,

흙에서 솟아

흙에로 흩어져 돌아갔을,

 

인간기생(人間寄生)을 모를

사람들.

 

  산정(山頂)의 제왕(帝王)…….

  얼마나 좋은가.

 

  그리고 나의 발 아래 저렇게 많이

  산의 경사(傾斜)를 좇아 무진한 돌들이

  천골 만색으로 붙어 있지 아니한가.

 

  대지(大地)에는 지열(地熱)도 영천(靈泉)도 솟는다 하데 마는,

  짐(朕)이 디디고 있는 이 산은 인육(人肉)으로 구축(構築)된

  말 하자면 기생탑(寄生塔)일세.

 

  해서 그들의 등가죽엔 강물이

  흐르지 않는단 말야.

 

헌데 그런 건 그렇고. 우스운 이야기는

따에 붙어 사는 그 버섯들의 살림살이 말일세.

 

그들이야말로 이런 따위,

저희끼리 눈 감고 아웅하는 격,

왕궁(王宮)과 통치권엔 아랑곳 없으니까.

 

2차대전 저물어 가기 얼마 전의 이야길세.

두만강변(豆滿江邊) 어느 촌락(村落)을 지남 길

한 할아버지로부턴 이런 이야길

들은 일이 있네.

 

  우리하고 글쎄 무슨 상관이 있단 말요.

  왜 자꾸 와 귀찮게 찝쩍이냐 말요.

  내 멀쩡한 사지(四肢)로 땅을 일궈서

  강냉이, 고구마, 조를 추수하고

  옆 마을 해삼(海蔘)장 점북과 바꿔 오구,

  시집 보내구, 장가 보내구, 잘 사는데

  글쎄 뭘 어떻거겠단 말이랑요.

 

그러나, 그들의 마을에도, 등가죽에도,

방방곡곡 벅어 온 낙지의 발은

악착스레 착근(着根)하여 수렁이 되었나니.

그렇다 오천년간 만주의(萬主義)는

백성의 허가 얻은 아름다운 도적이었나?

 

조선일보, 1959. 1

 

 


 

신동엽[申東曄, 1930.8.18 ~ 1969.4.7] 시인

1930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전주 사범, 단국대 사학과 및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가 입선. 1963년 시집『阿斯女』 간행. 1967년 서사시 「錦江」 발표. 1969년 간암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