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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춘수 시인 / 명일동 천사의 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1.

김춘수 시인 / 명일동 천사의 시

 

 

앵초꽃 핀 봄날 아침 홀연

어디론가 가버렸다.

비쭈기나무가 그늘을 치는

돌벤치 위

그가 놓고 간 두 쪽의 희디흰 날개를 본다.

가고나서

더욱 가까이 다가 온다.

길을 가면 저만치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들리고

날개도 없이 얼굴 지운.

 

 


 

 

김춘수 시인 / 물망초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도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날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김춘수 시인 / 부재(不在)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 없이 져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靑石(청석)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 일 없이 세월(歲月)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늪, 문예사, 1950

 

 


 

 

김춘수 시인 / 분수(噴水)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離別)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김춘수 시인 / 사모곡

 

 

주신 사랑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주신 말씀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오밤중에 전기불 꺼지듯 나 삽니다.

하느님

나는 꼭 하나만 가질래요.

세상 것 모두 눈 감을래요.

하느님

나는 꼭 그 사람만 가질래요.

산엔 돌치는 징소리 내가슴에 너 부르는 징소리.

솔밭이 여긴데 솔향기에 젖는데

솔밭도 나도 다 두고 넌 어디쯤서 길 잃었니.

나도 바람이더면 아무대나 갈껄

그대 가는 곳 어디라도 갈껄

내가 물이라면 아무대나 스밀껄

그대 몸 속 마알간 피에라도 스밀껄

 

 


 

김춘수 시인(金春洙 1922년-2004년)

 

아명은 대여(大.餘). 1922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충무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교 예술학부에서 공부했으나, 1942년에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판하여 1943년에 퇴학당했다. 1946년에 귀국하여 1951년까지 통영중학교, 마산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1946년에 시 <애가>를 발표하면서 등단, 이 때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1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교단에 들어선 그는 1964년부터 1978년까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영남대학교의 문리대 학장을 지내다가 1981년에 정계로 들어오며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시인과 평론가로서 활동한다. 1948년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 출간을 시작으로 시 <산악(山嶽)>, <사(蛇)>, <기(旗)>, <모나리자에게>,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을 발표하였다. 다른 시집으로는 <늪>,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타령조 기타>, <처용(處容)>, <남천>, <비에 젖은 달> 등이 있다. 1958년에 한국시인협회상, 1959년에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