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시인 / 고향(故鄕)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山)을 둘르고 돌아 앉아서 산(山)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는 마을
마을에선 먼 바다가 그리운 포푸라 나무들이 목메어 푸른 하늘에 나부끼고
이웃 낮닭들은 홰를 치며 한가히 고전(古典)을 울었다.
고향엔 고향엔 무슨 뜨거운 연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곡예사(曲藝師)
가벼우나 슬픈 음악(音樂). 관객(觀客)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할 때, 곡예사(曲藝師)의 가슴엔 싸늘한 바람이 스쳐 간다.
아슬아슬한 새 기술(技術)을 부리기 위하여 파리한 얼굴의 여자(女子)와 표정 없는 구리빛 가슴의 사나이가 줄을 타고 오를 때 껌을 씹으며 담배를 피우며 과자를 먹으며 얼마나 신기한 기대(期待)를 보내는 관중(觀衆)들이었던가.
이런 상업(商業)일수록 인기가 있어야 하고 또 새로운 멋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곡예사(曲藝師)는 오늘도 위험(危險)한 공간(空間) 속에 살아야 한다.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에로 서로 옮겨 탄 순간(瞬間)과 순간(瞬間).
담배 연기 자욱한 아득한 하늘 위에서 아 저러다 떨어지면 어떡하나? 그런 것은 벌써 잊어버린 곡예사(曲藝師)의 어저께와 오늘―
하얀 손의 여자(女子)여 곡예사(曲藝師)에 너의 입술에 어린 떨리는 생명(生命)의 포말들을 삼키며 아 인간(人間)은 왜 이처럼 잔인(殘忍)해야만 하는가.
원폭(原爆)의 하늘처럼 소란한 오늘의 기류(氣流)― 그 속에서 오히려 네가 지니는 한 오리의 질서(秩序)가 오늘은 무한(無限)한 기쁨처럼 나를 울린다.
현대의 신화, 위성문화사, 1958
김규동 시인 / 기러기
얘야 숨을 죽이고 기러기 울음 소리를 듣자 이북 고향에서 내려오는 저 새의 속삭임을 조심조심 밤하늘에 놓이는 이 울음은 내 어머님의 소식이요 네 삼촌과 고모의 안부도 전하는 고마운 말이다 두만강 끝에서 백두산을 스쳐 개마고원 금강산을 넘고 아득히 휴전선도 지나 한양 서울까지 조선의 깊은 하늘을 날으는 저 부드러운 숨결은 바람처럼 물처럼 가슴을 적셔주는구나 얘야 이제는 정말 가야 한다 형제들 애타게 기다리는 저 북으로 생각하면 끊어야 할 것이 어찌 한두 가지냐 수많은 것을 끊고 이 40년 통한의 슬픔 박차고 일어서야 한다 7천만이 한몸이 되어 이 죽음의 사슬을 끊자 독재와 억압, 착취와 분노의 어둠을 뚫고 외세에 묶인 설움의 세월을 청산하자 한라에서 백두까지 오 백두에서 한라까지 자주 해방의 날 이룩하자 얘야 숨을 죽이고 들어보아라 오늘 밤 북에서 오는 저 손님은 이제 때가 왔음을 일러주고 있다 통일의 밝은 빛이 트여옴을 알려주는구나 또 전하기를 백 살 난 내 어머님도 여태 살아 계시고 네 삼촌과 고모도 백두산 밑 그 옛 터에 잘들 살고 있단다 올해는 풍년이 들어 누런 들가엔 겨례의 노랫소리 흥청거린다고 기러기 끼이욱 끼욱…… 반가운 소식 전해주는구나.
오늘밤 기러기떼는, 동광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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