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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동엽 시인 / 아사녀(阿斯女)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9.

신동엽 시인 / 아사녀(阿斯女)

 

 

모질게도 높은 성(城)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邑)에서 읍

학원(學園)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래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餓鬼)들은

그혀 도망쳐 갔구나.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旗幅)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 보았나?―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사월십구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陽)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三韓)으로 백제(百濟)로 고려(高麗)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 오른 아사달(阿斯達) 아사녀(阿斯女)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물러가라, 그렇게

쥐구멍을 찾으며

검불처럼 흩어져 역사의 하수구 진창 속으로

흘러가버리렴아, 너는.

오욕된 권세(權勢) 저주받을 이름 함께.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개나리․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해 바닷가의 촌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怒濤)처럼 일어난 이 새피 뿜는 불기둥의

항거……

충천하는 자유에의 의지……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億劫)을 두고 젊음쳐 뒤를 이을지어니

 

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戰士)의

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

 

학생혁명시집, 1960

 

 


 

 

신동엽 시인 / 아사녀(阿斯女)의 울리는 축고(祝鼓)

 

 

1

 

줄줄이 살뼈도 흘러나려 내를 이루고 원한은 물레밭을 이랑 이뤄 만사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젓는 하늘 속으로 진주(眞珠)배기 치마폭 화사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황토벌, 전쟁을 불지르고 간 원생림(原生林)에 한가닥 노래 길이 열려 한가한 마차처럼 대륙이 기어오고 있었다.

 

오월의 숲속과 뻐꾸기 목메인 보리꺼럭 전설(傳說)밭으로.

가슴 뫼로 허리 논으로 마음 벌판으로 장마철 비바람은 흘러나리고.

산골 물소리 만세소리 폭폭이 두 가슴 쥐어뜯으며 달팽이 장장마다 호미 세 자루 조밥 한 줌 흘려보낸 철도연변 원분(怨墳)은 천만리(千萬里) 멀었다.

 

구름이 가고 새봄이 와도 허기진 평야, 낙지뿌리 와 닿은 선친들의 움집뜰에 왕조(王朝) 적 투가리 떼는 쏟아져 강을 이루고, 바다 밑 용트림 휘올라 어제 우리들의 역사밭을 얼음 꽃피운 억천만 돌창떼 뿌리 세워 하늘로 반란한다.

 

2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푸른 가슴 턱 차도록 머리칼 날리며 늘메기 꿀 익는

유월의 산으로 올라 보아라.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벗겨진 산골짝마다 산 열매 익고

개울 앞마다 머리 반짝이는 빛나는 탄피(彈皮)의 산.

포푸라 늘어진 등성이마다

도마뱀 산동리(山洞里) 끝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바위를 굴려 보아라. 십삼도 강산 가는 곳마다 매미 우는 마을. 무너진 토방 멀리 도시로 가는 반질 달은 나무 뿌리 흰 신작로를 달리어 보아라.

 

바위를 굴려 보아라. 고초장 땀 흘리던 순이네 북간도. 자운영 독사풀 뜯어 헛간집 이어 온 삼복(三伏), 부대끼며 군침 씰룩이던 황소 혓바닥처럼 검은 진주쌀 핏대 올린 연산군의 자유 많은 연설 소리를 들어 보아라.

 

유월의 동산으로 올라 보아라.

콩밭마다 딩굴던 향기 진한 대가리.

팔월이 오면 점심 마당 농주(農酒)통,

구슬 뿌리며 역사마다 구멍 뚫려 쏟아져 간 아름다운 얼굴, 북부여(北扶餘) 가인(佳人)들의 장삼자락 맨 몸을 생각하여 보아라.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황진이(黃眞伊) 마당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땅, 놋거울 속을 아침 저녁 드나들었을 눈매 고흔 백제 미인들의.

지금도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늘로 가는 길가엔 고개마다 괴나리봇짐 쇠바퀴 밑으로 쏟아져 간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아우성 소리를 들어 보아라.

 

3

 

목메어 휘젓던 울창한 숲은 비 젖은 빛나는 구름밭에 휘저오르고.

멍석딸기 무덤을 나와 찔레덤풀로 기어들은 발해(渤海)는 바위에서 성긴 숲으로 숲에서 다시 불붙는 태고적 산불로 어울려 목숨과 팔뚝의 불붙는 천지로 타오른 그날 임진난리의 우렁찬 외침을 귀기울여 보아라.

 

침을 삼키며 싱싱한 하늘로 올라 보아라.

이랑진 빨래터 강마을마다 매듭 고흔 손으로 묻어진 어여쁜 지뢰(地雷)의 얼굴, 신무기(新武器)의 오손도손한 살림살이를 구경하여 보려무나.

 

유월의 동산으로 올라 보아라.

밀짚모자 깃을 추켜 이마 훔치던 경부선(京釜線) 가로수 총 메인 소녀.

참쑥 뭉쳐 꿀꺽이며 압록강으로 제주도로 바다로 골짜기로 반만년 쫓기던 민텅구리 죄 없는 백성들의 터진 맨발을 생각하여 보아라.

 

귀밑머리 날리며 이월의 동산에 올라 미소짓던 사람아. 다사로와라. 우리들의 전답(田畓)만은 상처 없이 누워 있었구나.

 

하여 목 마치게 바위뿌리 나무등걸 쥐어뜯으며 뱃바닥 얼굴 가슴 닳도록 영웅(英雄)스레 기어오른 산마루턱 턱마다 가슴턱 차도록 트인 동해,

구름 속 꿈틀거리는 의지 굳은 봉우리마다 아우성 섞인 억천만.

억만년 여름날의 뼛죽 지글거린 하늘 끝 억심을 구가하여 보아라.

 

자유문학(自由文學), 1961. 11

 

 


 

 

신동엽 시인(1930년-1969년)

신동엽(申東曄,)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 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1949년 부여 주변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족청년회 선전부장으로 일하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됐다.

1953년 단국대를 졸업한 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어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 거리에 헌책방을 열었다. 신동엽은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을 만났다. 1957년 인병선과 결혼한 뒤 고향으로 낙향하여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58년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 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 독서와 문학 습작에 몰두하다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