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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동엽 시인 /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8.

신동엽 시인 /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게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들 내던져 버리데.

 

꽃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창작과비평, 1968. 여름호

 

 


 

 

신동엽 시인 / 싱싱한 동자(瞳子)를 위(爲)하여

 

 

도시(都市)에 밤은 나리고

벌판과 마을에

피어나는 꽃 불

 

1960년대(年代)의 의지(意志) 앞에 눈은 나리고

인적(人跡) 없는 토막(土幕)

강(江)이 흐른다.

 

맨발로 디디고

대지(大地)에 나서라

하품과 질식 탐욕(貪慾)과 횡포(橫暴)

 

비둘기는 동해(東海) 높이 은(銀)가루 흩고

고요한 새벽 구릉(丘陵)이룬 처녀지(處女地)에

쟁기를 차비하라

 

문명(文明)높은 어둠 위에 눈은 나리고

쫓기는 짐승

매어달린 세대(世代)

 

얼음 뚫고 새 흙 깊이 씨 묻어두자

새봄 오면 강산(江山)마다 피어날

칠흑 싱싱한 눈동자(瞳子)를 위하여.

 

교육평론, 1960년 1월

 

 


 

 

신동엽 시인 / 아니오 1

 

 

아니오

미워한 적 없어요,

산 마루

투명한 햇빛 쏟아지는데

차마 어둔 생각 했을 리야.

 

아니오

괴뤄한 적 없어요,

능선(稜線) 위

바람 같은 음악 흘러가는데

뉘라, 색동 눈물 밖으로 쏟았을 리야.

 

아니오

사랑한 적 없어요,

세계의

지붕 혼자 바람 마시며

차마, 옷 입은 도시(都市)계집 사랑했을 리야.

 

아사녀, 문학사, 1963

 

 


 

신동엽[申東曄, 1930.8.18 ~ 1969.4.7] 시인

1930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전주 사범, 단국대 사학과 및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가 입선. 1963년 시집『阿斯女』 간행. 1967년 서사시 「錦江」 발표. 1969년 간암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