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눈짓)가 되고 싶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김춘수 시인 / 가을 저녁의 詩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山)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늪, 문예사, 1950
김춘수 시인 / 갈대 섰는 풍경(風景)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늪, 문예사, 1950
김춘수 시인 / 너와 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김춘수 시인 / 거리에 비 내리듯
비 개인 다음의 하늘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꼬꼬리새 무릎을 보라. 발톱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네 입술 네 목젖의 얼룩을 보라. 면경(面鏡)알에 비치는 산과 내 비 개인 다음의 봄바다는 언제나 어디로 떠나고 있다.
남천(南天), 근역서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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