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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춘수 시인 / 꽃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9.

김춘수 시인 /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눈짓)가 되고 싶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김춘수 시인 / 가을 저녁의 詩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山)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늪, 문예사, 1950

 

 


 

 

김춘수 시인 / 갈대 섰는 풍경(風景)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늪, 문예사, 1950

 

 


 

 

김춘수 시인 / 너와 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김춘수 시인 / 거리에 비 내리듯

 

 

비 개인 다음의

하늘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꼬꼬리새 무릎을 보라. 발톱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네 입술

네 목젖의 얼룩을 보라.

면경(面鏡)알에 비치는

산과 내

비 개인 다음의 봄바다는

언제나 어디로 떠나고 있다. 

 

남천(南天), 근역서재, 1977

 

 


 

김춘수 시인(金春洙 1922년-2004년)


아명은 대여(大.餘). 1922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충무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교 예술학부에서 공부했으나, 1942년에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판하여 1943년에 퇴학당했다. 1946년에 귀국하여 1951년까지 통영중학교, 마산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1946년에 시 <애가>를 발표하면서 등단, 이 때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1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교단에 들어선 그는 1964년부터 1978년까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영남대학교의 문리대 학장을 지내다가 1981년에 정계로 들어오며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시인과 평론가로서 활동한다. 1948년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 출간을 시작으로 시 <산악(山嶽)>, <사(蛇)>, <기(旗)>, <모나리자에게>,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을 발표하였다. 다른 시집으로는 <늪>,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타령조 기타>, <처용(處容)>, <남천>, <비에 젖은 달> 등이 있다. 1958년에 한국시인협회상, 1959년에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