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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규동 시인 / 나비와 광장(廣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1.

김규동 시인 / 나비와 광장(廣場)

 

 

현기증(眩氣症) 나는 활주로(滑走路)의

최후(最後)의 절정(絶頂)에서 흰 나비는

돌진(突進)의 방향(方向)을 잊어버리고

피묻은 육체(肉體)의 파편(破片)들을 굽어 본다.

 

기계(機械)처럼 작열(灼熱)한 작은 심장(心臟)을 축일

한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虛妄)한 광장(廣場)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眼膜)을 차단(遮斷)하는 건

투명(透明)한 광선(光線)의 바다뿐이 없기에―

 

진공(眞空)의 해안(海岸)에서처럼 과묵(寡黙)한 묘지(墓地) 사이사이

숨가쁜 Z기(機)의 백선(白線)과 이동(移動)하는 계절(季節)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潮水)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未來)의 어느 지점(地点)에

아름다운 영토(領土)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滑走路)의 어느 지표(地標)에

화려(華麗)한 희망(希望)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神)도 기적(奇蹟)도 이미

승천(昇天)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流域)―

그 어느 마지막 종점(終点)을 향(向)하여 흰 나비는

또한번 스스로의 신화(神話)와 더불어 대결(對決)하여 본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나체(裸體)속을 뚫고 가는...

원제 : 나체(裸體)속을 뚫고 가는 무수(無數)한 구토(嘔吐)

 

 

스스로 운명(運命)의 전말을

알 수가 있는 것이라면

끝모를 전진의 대열에서

낙오하여도 좋을 것을―

 

그러나

다행스러운 시간(時間)이 있어

'타이찌'섬의 토족처럼 태양(太陽)을 반기는 오후

메마른 육체 속에서도

오히려 생각의 물결은 파도쳐 온다.

 

또다시 여름이 오는 강엔

지난해와 같은 권태로운 풍경이 걸리고

미운 나체(裸體)를 하고

사장에 누우면

바람결에 나부껴 오는 조고마한 행복의 그늘이 있다.

 

움직이는 것

모든 것이 정지할 줄 모르는

역학(力學)위를 달리고

신경을 자극하는 것, '모―타보―트'의 소음뿐이다.

 

여기는 아세아(亞細亞)―

남북으로 갈리운 한반도의 서울,

가난과 무지와 폭력만이

강물 모양 도도히 흐르는 특수(特殊) 지역(地域).

 

허구많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탄식과 고독이 익어가는

우리들의 생활 위에

덧없이 쌓여가는 계절의 속삭임이여

 

도무지 애착이 가지 않는 육체와 사상(思想)

한 마리 짐승처럼 늙어만 가는

하나의 실존(實存)을 돌아다 보며

새삼스러이 '까뮤'의 역설(逆說)을 긍정(肯定)해서가 아니건만

문득 서글픈 구토(嘔吐)를 느껴보는 오후가 있는 것이다.

 

현대의 신화, 위성문화사, 1958

 

 


 

 

김규동 시인 / 내 가슴속에 기계(機械)가

 

 

바람 소리.

바람이 부는 날은

내 가슴 속에서도 소리가 난다.

 

금문도(金門島)를 폭격(爆擊)한 중공군(中共軍)의 미이그기(機)들.

하늘은 푸르고,

내 가슴 속에서 소리가 난다.

 

심(甚)한 신경쇠약증상(神經衰弱症狀)도

폐결핵(肺結核)도

생활(生活)속에서 내가 안고 나온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症)―

 

그런 것은

오늘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속력(速力)에 떠가는 하나의 '시튜에이션'

배후(背後)를 꾸밀 빛깔은

지금 내 손에 없다.

 

질서(秩序)와 크낙한 제국(帝國).

옛친구들은 그런 것을 찾아서

떠나기도 했고,

죽음과 탄생(誕生)이

긴 시간(時間)의 테두리를 수없이 돌아왔을 뿐,

 

나의 내부(內部)에선

지금 기계(機械)의 움직임

 

무슨 소린지 모를 소리가 나고,

허무(虛無)라든가 공허(空虛)라든가

그런 것들이 빈번하게

긴 행렬(行列)을 짓고

소리를 내며 간다.

 

현대의 신화, 위성문화사, 1958

 

 


 

 

김규동 시인 / 노래

 

 

빗발이 듣는 세느강엔

둥둥 떠가는 가마니와 함께

황소 머리를 닮은

몇 개의 뿔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군마 소리는

강심 깊이 잦아들고

피에 얼룩진 여러 개의 선언이

전봉준의 핏발선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노틀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으나

거대한 아프리카 코끼리를 몰고 온

앙드레 브르똥의 야유와 공격 때문에

세느강 황토 빛깔의 우수를

퍼담는 일을 종내 포기해야만 했다

엷은 입술에 빗물을 물고

보들레르가

콧소리로 모음자 발음만 하며

급진사상에 대하여

모종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떠올랐다

서둘러 흐르는 강심에

성난 뿔은 잠겨가고

강변의 노점 책방은 닫혔는데

잉어들은 흙탕물 속에서도

빠리의 투명한 지성을

미인들의 회색빛 겨드랑 사이로

멀리멀리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세월이 세느강에 흐르고

말하지 않는 죽음과 사랑도

긴 역사의 다리 아래를 흘렀다

흰 돌들과 늘어진 가로수를 스쳐

서편 하늘을 비껴가는

암울한 만가를 물결에 뒤섞으며.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김규동 시인(金奎東 1925~2011)

호는 문곡(文谷). 1925년 2월 13일 함북 경성 출생. 경성고보를 거쳐 1946년 연변의대를 수료했고 평양종합대학을 중퇴했다. 경성고보시절 스승 김기림(金起林)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시 「강」이 당선되어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며, 1951년 박인환(朴寅煥)‧김경린(金璟麟) 등과 함께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했다.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는 살리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포대가 있는 풍경」이 각각 당선되기도 했다.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했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역임한 바 있다. 그의 시작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나비와 광장』(1955), 『현대의 신화』(1958) 등을 발간했던 1960년 초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포대가 있는 풍경」, 「어느 병상의 연대」 등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쟁 관련 소재,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의식, 현실의 비판적 추구 등의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많이 발표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시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으로 활동한 것은 그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이 시기의 시적 경향은 시집 『죽음 속의 영웅』(1977), 『깨끗한 희망』(1985), 『오늘 밤 기러기떼는』(1989)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시는 통일문제, 노사문제, 학생시위 등 현실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거니와, 이는 현실의 문제에 능동적인 참여와 실천을 강조한 사회파 모더니즘으로의 적극적인 변모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시집으로는 『나비와 광장』(1955), 『현대의 신화』(1958), 『죽음 속의 영웅』(1977), 『깨끗한 희망』(1985), 『오늘 밤 기러기떼는』(1989), 『느릅나무에게』(2005) 등이 있고, 시선집 『생명의 노래』(1991), 『길은 멀어도』(1991), 『흰각시 붓꽃』(1993) 등이 있다. 2011년 시인의 시 432편을 모은 『김규동 시전집』이 창비사에서 발간되었다. 시작 이외에 평론활동도 꾸준히 계속하여 『새로운 시론』(1959), 『지성과 고독의 문학』(1962),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1979) 등의 평론집을 내기도 했으며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2011)이 있다. 1960년에 자유문인회협상, 2006년 만해문학상, 201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99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1년 9월 28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