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數千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시인 / 서풍부(西風賦)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 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구름과 장미(薔薇), 행문사, 1948
김춘수 시인 / 순명(順命)
처서 지나고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게 되면 고목나무 줄기나 바위의 검붉은 살갗 같은 데에 하늘하늘 허물을 벗어놓고 매미는 어디론가 가 버린다.
가을이 되어 수세미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런 수세미의 허리에 잠자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
가서 기척을 해봐도 대꾸가 없다. 멀거니 눈을 뜬 채로다. 날개 한 짝이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자 긴 꼬리의 중간쯤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
김춘수 시인 / 인동(忍冬) 잎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타령조(打令調).기타(其他), 문화출판사, 1969
김춘수 시인 / 정
외로운 밤이면 자꾸만 별을 보았지. 더 외로운 밤이면 찬란한 유성이 되고 싶었지. 그토록 그리움에 곱게곱게 불타오르다간 그대 심장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별빛처럼 포옥 묻히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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