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시인 / 눈 나리는 밤의 시(詩)
고독(孤獨) 속에서는 낡은 서적(書籍)이 풍기던 곰팡이 내음새가 풍겼다.
벗은 '타이피스트' 아가씨처럼 경쾌(輕快)한 솜씨로 무한(無限)한 시(詩)를 써갔다.
먼 시간(時間)의 경과(經過) 뒤에 오는 피곤(疲困)과 같은 애수(哀愁). 부두(埠頭)가에서는 지금쯤 하얀마스트가 맥없이 깃발을 내리고 있으리.
숱한 어저께들처럼 검은 공간(空間)을 기웃거리는 1953년(年)의 얼굴 얼굴들.
여자(女子)들은 푸른 물굽이에 안기우며 출렁이는 해협(海峽)을 건너갔다고 한다. 때묻은 활자(活字) 위에 함박눈처럼 나리는 밤의 침묵(沈黙)!
전쟁(戰爭)이 지나간 도시(都市)는 뭇 연대(年代)의 기억(記憶)속에 잠들어가고,
모든 전사(戰士)들은 황폐(荒廢)한 화성(火星)의 평면(平面)에 그들의 대열(隊列)을 짓고 있을 뿐이다.
……눈이 나리는 밤! ……눈이 나리는 밤의 실내(室內)!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김규동 시인 / 달아오를 아궁이를 위한 시
시가 안 되어 별짓 다 해보다 아궁이를 뜯었다 동서고금 유명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이것저것 외워도 보고 그것을 쓸 때의 시인의 모습을 그려보고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마감날은 지났는데 고민하던 끝에 아궁이를 뜯었다 앞집 아주머님네는 팔만 원 들여 온돌까지 뜯었지만 그런 것은 엄두도 못내고 만만한 아궁이를 뜯었다 시꺼먼 연탄을 두 장씩 삼켜먹고도 얼음장인 이 온돌은 도대체 무엇이냐 검붉게 썩은 방바닥이 발이 시리다 저주스런 방이다 쌍말로 빌어먹을 온돌이다 정을 대고 망치질을 해서 뜯어낸 다음 허리 아래 묻혔던 화로를 가슴팍까지 끌어올려서 묻고 급한 성미에 맨 손으로 시멘트를 반죽해서 든든하게 발랐다 완전히 반나절이 걸렸다 이까짓 일을 하는데 반나절이 걸린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시를 쓴다더니 뭘 하느냐고 놀랐다 나는 먼지를 뒤집어 쓴 얼굴로 담배 한대 피워물고 무슨 커다란 자신이라도 선 것처럼 한 마디 하였다 이젠 틀림없을 거요 어디 불 한번 넣어 보시오라고 밤낮 무슨 실험 같은 것이나 하고 사는 이런 남편을 믿고 평생을 사는 아내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으나 마음은 새로이 안정을 얻은 듯 싶었다 저녁에 대학을 마치고 회사에 다니는 큰아이가 퇴근하고 돌아와 모래 되어 쓰러진 애비보고 한마디 수고했다는 인사도 없이 족보에 없는 음악을 듣고 앉았는 것이 약간 서운하기는 했으나.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김규동 시인 / 대위(對位)
하얀 페이브멘트위에 뿌려지는 태양(太陽)의 조수(潮水)가 어린 담수어(淡水魚)와 같다고 하던 여자(女子)는 화성(火星)에의 비상(飛翔)이 그 마지막 염원(念願)이라 하였다.
사나이들은 예고(豫告)도 없이 섬광(閃光)하는 전쟁(戰爭)의 태풍(颱風) 속에 아무렇게나 그들의 육체(肉體)를 잃어버리고,
'부루―스트'의 작품(作品)에서처럼 로켓의 포물선(抛物線)이 의식(意識)의 공간(空間)을 스쳐 갈 때 '이스라엘'의 백성(百姓)과도 같이 신(神)의 영광(榮光)을 찬양(讚揚)하는 우리들의 대열(隊列)엔 '도―바'해협(海峽) 함대사령관(艦隊司令官)의 푸른 행운(幸運)이 영원(永遠)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전쟁(戰爭)의 탄도(彈道)를 날러간 어린 나비들은 원시림(原始林)의 정신(精神)을 넘어 찬란한 대위(對位)의 층계(層階)를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나비와 광장, 산호장,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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