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시인 / 두만강
얼음이 하도 단단하여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못 타고 썰매를 탔다 얼음장 위에 모닥불을 피워도 녹지 않는 겨울 강 밤이면 어둔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 들려왔다 우리 독립군은 이런 밤에 국경을 넘는다 했다 때로 가슴을 가르는 섬뜩한 파괴음은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 나운규는 '아리랑'을 썼고 털모자 눌러쓴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과 싸웠다 지금 두만강엔 옛 아이들 노는 소리 남아 있을까 통일이 오면 할 일도 많지만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놓아 울고 나서 흰 머리 날리며 씽씽 썰매를 타련다 어린 시절에 타던 신나는 썰매를 한번 타보련다.
오늘밤 기러기떼는, 동광출판사, 1989
김규동 시인 / 두보(杜甫)
해는 졌습니다 강물이 슬피 웁니다 까마귀 집으로 돌아갑니다 손이 곱아 띠를 맬 수 없는데 옷은 짧아 바람이 시립니다 양식은 떨어져 막내둥이는 굶어 죽었고 전쟁은 계속됩니다 아득한 이 하늘가 묵어갈 잠자리는 있을는지.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김규동 시인 / 무등산
한 몸이 되기도 전에 두 팔 벌려 어깨를 꼈다 흩어졌는가 하면 다시 모이고 모였다간 다시 흩어진다 높지도 얕지도 않게 그러나 모두는 평등하게 이 하늘 아래 뿌리박고 서서 아 이것을 지키기 위해 그처럼 오랜 세월 견디었구나.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김규동 시인 / 무서운 아이들
대룡이는 혀가 짧아 말을 제대로 못했다 성문에서 뛰어내리다 혀를 깨물었다고 했다 큰 머리에 두어 군데 흉터가 있는데 거기만 머리털이 없었다 아이들은 대룡이를 대룡 대룡 똥대룡 하고 놀렸다 그러면 대룡이가 입을 해벌리고 쫓아왔다 아이들은 달아나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뒤로 돌아가 막대기로 차기도 했다 대룡이는 어쩔 줄 모르고 멈춰서서 어허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히히 웃으며 잔인한 짓거리 저지르기 좋아하던 무서운 아이들 아이들은 여럿 함께 달려들어 그를 쓰러뜨리고 때렸다 얻어맞으면서 그는 모를 소리 배앝으며 마구 울었다 대룡이는 코피를 흘렸다 아이들이 다 가버린 운동장 구석 같은 데서 흙투성이가 된 채 뒹굴며 그는 슬피 울었다 대룡이네 집은 어딘지 모르나 학교에서 아주 멀다고 했다 어스름 저녁 멍하니 앉아 있을 때 어디선가 대룡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아이들 얼굴은 다 잊었으나 대룡이 피에 젖은 얼굴이 선히 보인다 나보다 윗반이던 검은 옷 입은 대룡이, 대룡이는 지금 이북에 살아 있을까 혀가 짧아 말을 더듬거리던 가엾은 대룡이 어서 통일이 되어 다만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나보았으면.
깨끗한 희망, 창작과비평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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