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 갈대
1
너는 슬픔의 따님인가 부다.
너의 두 눈은 눈물에 어리어 너의 시야(視野)는 흐리고 어둡다.
너는 맹목(盲目)이다. 면(免)할 수 없는 이 영겁(永劫)의 박모(薄暮)를 전후좌우(前後左右)로 몸을 흔들어 천치(天痴)처럼 울고 섰는 너.
고개 다수굿이 오직 느낄 수 있는 것, 저 가슴에 파고드는 바람과 바다의 흐느낌이 있을 뿐
느낀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 다른 눈. 눈물겨운 일이다.
2
어둡고 답답한 혼돈(混沌)을 열고 네가 탄생(誕生)하던 처음인 그날 우러러 한 눈은 하늘의 무한(無限)을 느끼고 굽어 한 눈은 끝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를 보았다. 푸른 하늘의 무한(無限). 헤아릴 수 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
그때부터였다. 하늘과 땅의 영원(永遠)히 잇닿을 수 없는 상극(相剋)의 그 들판에서 조그만 바람에도 전후좌우(前後左右)로 흔들리는 운명(運命)을 너는 지녔다.
황홀(恍惚)히 즐거운 창공(蒼空)에의 비상(飛翔). 끝없는 낭비(浪費)의 대지(大地)에의 못 박힘. 그러한 위치(位置)에서 면(免)할 수 없는 너는 하나의 자세(姿勢)를 가졌다. 오! 자세(姿勢)―기도(祈禱).
우리에게 영원(永遠)한 것은 오직 이 것뿐이다.
기(旗), 문예사, 1951
김춘수 시인 / 늪 2
늪을 지키고 섰는 저 수양버들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금쟁이 같은 것 물장군 같은 것 거머리 같은 것 개밥 순채 물달개비 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슬픈 이야기가 있다.
산도 운다는 푸른 달밤이면 나는 그들의 슬픈 혼령(魂靈)을 본다.
갈대가 가늘게 몸을 흔들고 온 늪이 소리없이 흐느끼는 것을 나는 본다.
늪, 문예사, 1950
김춘수 시인 / 경(瓊)이에게
경이는 울고 있었다. 풀덤불 속으로 노란 꽃송이가 갸우뚱 내다보고 있었다.
그 것뿐이다. 나는 경이가 누군지를 기억지 못한다.
구름이 일다 구름이 절로 사라지듯이 경이는 가버렸다.
바람이 가지 끝에 울며 도는데 나는 경이가 누군지를 기억지 못한다.
경이, 너는 울고 있었다 풀덤불 속으로 노란 꽃송이가 갸우뚱 내다보고 있었다.
구름과 장미(薔薇), 행문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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