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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애경 시인 /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1 立冬 지난 후 해는 산 너머로 급히 진다. 서리 조각의 비늘로 덮인 거리 어둠의 粒子가 추위로 빛나는 길목에서 나는 한 개비의 성냥을 긋고 오그린 손 속에 꽃잎을 급히 피워낸다. 불의 의상을 입으며 사물은 하나하나 살아나기 시작하지만 불은 가장 완벽하게 피었다 지는 꽃 화사한 절망. 절벽으로 떨어지듯 꺼진다.
2 기침을 한다 탄불을 갈며. 달빛 밑에 웅크리면 아궁이 옆으로 희미하게 흩어지는 그림자. 한밤중 여자들의 팔은 生活로 배추속처럼 싱싱하게 차오르지만 좀처럼 불은 붙지 않는다. 식구들은 구들에 언 잔등을 붙인다. 어떻게 된 것일까 옛집의 불씨는. 영원히 꽃피우는 전설의 나무와 같이 純金으로 제련된 불씨. 화로에 잘 갈무리되어 주인을 지켜주던.
3 이제 불은 때묻고 지쳤다. 누가 불을 거래하고 누가 불에게 명령하는가. 불길한 謀反의 충동에 몸을 떨며 콘크리트 보일러실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불의 꿈 밤 열 시 公員들은 흩어지고 불은 또 재 위에 몇 길이나 쓰러진다.
4 짧은 인사의 잔손목을 흔들다 말기. 부딪치다 와아 터지기. 안개 속에 서 있는 불 문을 열고 길길이 솟구치는 불 산맥 속에 잠들어 있는 원시림의 불.
5 牧丹 마른 가지에서 올라오는 불의 빛깔은 사과나무 장작에 옮겨 붙으며 만발한다. 쓰레기 더미에서도 불은 꽃핀다. 들끓으면서 평등한 불의 속 열은 순수하여 평화롭다.
6 열은 빛나지 않고 소리내지 않는다. 그러나 따갑게 퉁겨져 나와 손바닥을 쏘는 열기 우리의 입 다문 진실. 바람 부는 도시의 밑둥을 떠받치는 건강한 당신 일곱시 반에 집을 나와 아홉시 반에 퇴근하며 휘파람 부는 당신, 당신의 불.
7 이 속에 잠자는 불이 있다. 작은 성냥골 안에. 성냥은 불을 꿈꾸고 불은 성냥을 태운다. 순간의 불꽃은 기다림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바꾼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꿈을 시작한다.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양애경 시인 / 어린 벚꽃나무가 꽃피는 밤
괜히 신경이 서는 날 어린 벚꽃나무 한 그루를 생각한다
가느단 손가락 마디마다 물에 갓 씻은 銀같은, 보름날 달빛 같은 꽃봉오리를 달고 몸은 흑단빛,
뭉크의 <사춘기>에 그려진 이제 막 몽긋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젖가슴과 하나로 꼭 붙인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지고 불안한 눈빛을 한 소녀
그 소녀 어린 벚나무 밑둥에 묻혔다 유린당하고 목 졸려 살해되어
하늘은 진즉 어둡고 어두운 자주색 능선 위로 봄이 올 듯 밤공기가 뿌옇게 서성이는데
기름진 산흙 속에서 소녀의 하얀 허벅지가 분해된다 긴 갈색 머리카락은 아직 어느 벌레도 먹지 못했다
괜히 자다 깨어 잠 오지 않는 밤 눈을 감으면 어린 벚꽃 봉오리에서 팝콘처럼 하얗게 하얗게 꽃잎이 밀려나오는 게 보인다
일시에 쏟아져 내렸다
시집 『맛을 보다』(지혜, 201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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