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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애경 시인 /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4.

양애경 시인 /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1

  立冬 지난 후 해는

  산 너머로 급히 진다.

  서리 조각의 비늘로 덮인 거리

  어둠의 粒子가 추위로 빛나는 길목에서

  나는 한 개비의 성냥을 긋고

  오그린 손 속에 꽃잎을 급히 피워낸다.

  불의 의상을 입으며

  사물은 하나하나 살아나기 시작하지만

  불은 가장 완벽하게 피었다 지는 꽃

  화사한 절망.

  절벽으로 떨어지듯 꺼진다.

 

  2

  기침을 한다

  탄불을 갈며.

  달빛 밑에 웅크리면 아궁이 옆으로 희미하게 흩어지는 그림자.

  한밤중 여자들의 팔은

  生活로 배추속처럼 싱싱하게 차오르지만

  좀처럼 불은 붙지 않는다.

  식구들은 구들에 언 잔등을 붙인다.

  어떻게 된 것일까 옛집의 불씨는.

  영원히 꽃피우는 전설의 나무와 같이

  純金으로 제련된 불씨.

  화로에 잘 갈무리되어

  주인을 지켜주던.

 

  3

  이제 불은 때묻고 지쳤다.

  누가 불을 거래하고

  누가 불에게 명령하는가.

  불길한 謀反의 충동에 몸을 떨며

  콘크리트 보일러실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불의 꿈

  밤 열 시 公員들은 흩어지고

  불은 또 재 위에 몇 길이나 쓰러진다.

 

  4

  짧은 인사의 잔손목을 흔들다 말기.

  부딪치다 와아 터지기.

  안개 속에 서 있는 불

  문을 열고 길길이 솟구치는 불

  산맥 속에 잠들어 있는 원시림의 불.

 

  5

  牧丹 마른 가지에서 올라오는

  불의 빛깔은

  사과나무 장작에 옮겨 붙으며 만발한다.

  쓰레기 더미에서도 불은 꽃핀다.

  들끓으면서 평등한 불의 속

  열은 순수하여 평화롭다.

 

  6

  열은 빛나지 않고

  소리내지 않는다.

  그러나 따갑게 퉁겨져 나와 손바닥을 쏘는

  열기

  우리의 입 다문 진실.

  바람 부는 도시의 밑둥을 떠받치는

  건강한 당신

  일곱시 반에 집을 나와 아홉시 반에 퇴근하며

  휘파람 부는 당신,

  당신의 불.

 

  7

  이 속에 잠자는 불이 있다.

  작은 성냥골 안에.

  성냥은 불을 꿈꾸고

  불은 성냥을 태운다.

  순간의 불꽃은 기다림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바꾼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꿈을 시작한다.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양애경 시인 / 어린 벚꽃나무가 꽃피는 밤

 

 

  괜히 신경이 서는 날

  어린 벚꽃나무 한 그루를 생각한다

 

  가느단 손가락 마디마다

  물에 갓 씻은 銀같은,

  보름날 달빛 같은 꽃봉오리를 달고

  몸은 흑단빛,

 

  뭉크의 <사춘기>에 그려진

  이제 막 몽긋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젖가슴과

  하나로 꼭 붙인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지고

  불안한 눈빛을 한 소녀

 

  그 소녀

  어린 벚나무 밑둥에 묻혔다

  유린당하고 목 졸려 살해되어

 

  하늘은 진즉 어둡고

  어두운 자주색 능선 위로

  봄이 올 듯

  밤공기가 뿌옇게 서성이는데

 

  기름진 산흙 속에서

  소녀의 하얀 허벅지가 분해된다

  긴 갈색 머리카락은 아직

  어느 벌레도 먹지 못했다

 

  괜히 자다 깨어 잠 오지 않는 밤

  눈을 감으면

  어린 벚꽃 봉오리에서

  팝콘처럼 하얗게 하얗게

  꽃잎이 밀려나오는 게 보인다

 

  일시에 쏟아져 내렸다

 

시집 『맛을 보다』(지혜, 2011) 중에서

 

 


 

양애경 시인

1956년 서울에서 출생. 충남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청하, 1988)과 『사랑의 예감』(푸른숲, 1992),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창비, 1992), 『내가 암늑대라면』(고요아침, 2005),  『맛을 보다』 (지혜, 2011) 가 있음. 현재  '시힘' 과 '화요문학' 동인. 공주영상정보대학 영상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