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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석주 시인 / 완전주의자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4.

장석주 시인 / 완전주의자의 꿈

 

 

  1980년 12월 31일 오후 7시

  모든 스윗치를 내리고 석유스토브를 끄고

  사무실을 나왔다. 채 끝내지 못한 교정지와

  빈 책상들만 어둠 속에 남아 있을

  사무실과 내가 방금 내려온 어두운 계단들이

  내 뒤에 남겨져 있는 모든 것이다.

  나를 열기 위하여, 활짝 열려진 문처럼

  혹은 나를 닫기 위하여, 쾅쾅 못질하여 닫아버린 문처럼

  나는 일년을 살았다. 아니 일년을 죽었다.

  극장 앞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표를 사기 위하여

  긴 줄을 서고 있다. 커피잔에 담긴 無爲와

  재떨이에 눌러꺼진 담배꽁초들과

  신문가판대 옆에 붙어있는 소년들을 지나서

  나를 묶고, 혹은 나를 풀어주는 이 모든 不自由

  非本質들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참회하며 걷는다.

  날은 쉽게 어두워졌다. 밤 9시

  나는 이홉 소주 한 병에 발갛게 취한다.

  자기에게 몰두해 있던 사람에 취하고

  혈관의 피까지 결빙시키는 지독한 추위에 취하고

  삶이 사소함과 우연에 얽매인 것임을 깨달으며 취하고

  아니다, 아니야 라고 부정하며 취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모든 비본질의 노예인

  우리가 온갖 우연과 사소함으로 출렁이며 흐른다.

  밤 11시, 친구여 밤은 얼마나 깊었느냐.

  서울 시민의 몇 퍼센트가 편안한 잠에 들었느냐.

  지우리라, 이루어지지 않은 꿈과

  종로 바닥의 어두운 골목들로 숨어드는 어린 여인들의

  뒷모습과 만원인 호텔과 여관방들의 교합들을.

  아아, 나는 왜 이렇게 낯선 이들의 어깨에

  기대고 싶은 걸까. 아아, 나는 왜 이렇게

  따뜻하게 무작정 허물어지고 싶은 걸까.

  눈발은 자정 근처에서 잠시 흩날리고

  통행금지가 해제된 이 밤의 자유는 편안하다.

  느닷없는 종소리, 제야의 종소리?

  침묵에 이르는 병과 근시안경을 버리고

  나는 잠시 무엇인가를 소망하고 싶다.

  서울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싶다.

  깊은 밤거리의 한 모퉁이를 쌍쌍이 사라져 가는

  저들에게 고통주소서, 동파된 수도꼭지를 바라보며

  깨어있는 가난한 주부들과

  아직 잠들지 않은 그들의 아이들과

  새로 회임되는 미구의 태아들에게

  고통주소서, 그들의 잠이 달콤한 마약이 되기 위하여.

  우동국물에서 오르는 따뜻한 김과

  낯선 여자와 두 번 부딪치며 걷는다.

  나는 너무 취했다. 흐르는 세월, 술, 어둠에

  내 혈관들은 너무 혹사 당했다.

  이제까지 내 생명을 지켜주신 분이시여,

  나는 아무 물에나 힘없이 붕괴하는 모래탑입니까?

  이제 불켜진 집에 돌아가게 허락해 주십시요.

  고통이신, 그리고 사랑이신

  적막한 황혼의 하나님이여.

 

시집 『완전주의자의 꿈』(청하, 1981) 중에서

 

 


 

 

장석주 시인 / 그리운 나라

 

 

  1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젊은 날의 첫 아내가 사는 고향,

  지금은 모르는 언덕들이 생기고

  말없이 해떨어지면 묘비 비스듬히 기울어

  계곡의 가재들도 물그늘로 흉한 몸 숨기는 곳,

  이미 십년 전부터 임신 중인 나의 아내,

  만삭이 되었어도 그 자태는 요염하게 아름다우리.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연기가 토해내는 굴뚝

  속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굴뚝 아래

  검은 공기 속에서 낙과처럼 추락하는

  흰새들의 어두운 하늘 애꾸눈 개들이

  희디흰 대낮의 거리에서 수은을 토한다.

 

  ㅡ수은을 먹고 흘리는 수은의 눈물,

  눈물방울

  절벽 같은 천둥번개 같은,

 

  2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고

  너도밤나무 숲속 위의 하늘에도 그리운

  물고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자주 발견된다

  아내의 지느러미는 여전히 매끄럽고 그동안

  낳은 딸들은 낙엽 밑에 잠들어 있으리, 내 아내는

  여전히 낮엔 박쥐들을 재우고

  밤엔 붉고 검은 땅에 엎드려 알을 낳으리,

  아내의 삶에 약간의 이끼가 낀 것이

  변화의 전부이다, 내 앞가슴의

  거추장스러운 의문의 단추들이 툭툭 떨어진다.

 

  3

  나는 밤에 도착한다, 지난

  여름의 장마로 끊긴 다리의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눈치 빠른 새앙쥐들은 낯선 침입자를

  힐끗거리고 무심한 아내는 자전거만 타고 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흰 종아리가

  자전거의 폐달을 힘차게 밟을 때마다

  스커트자락 밑으로 아름답게 드러나곤 한다, 아아

  너무 늦게 돌아왔구나, 내 경솔함 때문에

  빠르게 날이 어두워지낟. 그동안 아내의

  입덧은 얼마나 심하였던가, 유실수의

  성한 열매들이 하나도 남아 았지 않다, 내가

  최후의 시장에서 인신매매업으로 치부를 할 때

  아내는 날개 달린 다람주처럼 날아다녔으리라.

  너도밤나무과의 북가시나무 숲속 위로 열린 하늘엔

  죽은 사람의 장례가 나가고 바람을 방목하는

  언덕의 숲속에서 누가 지느러미도 달리지 않은

  사람의 아들을 낳는다, 그림처럼 누운 아내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기도 전 아내는 힘없이 부서져내린다.

  그리움은 그렇게 컸구나,

  머릿속의 우글거리는 딱정벌레들을 한 마리씩 풀어 주어

  내 머릿속은 빈 병실 같다, 피안교(彼岸橋)를 건너서

 

  내일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시 최후의 시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시집 『그리운 나라』(평민사, 1984) 중에서

 

 


 

장석주 시인

1954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를 통해 등단.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본격적인 시작 활동 시작.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평론가로도 활동 中. 저서로는 시집으로 『햇빛사냥』, 『그리운 나라』,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한 바지』 등과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등의 평론집과 『낯선 별에서의 청춘』 등의 소설이 있음. 제1회 애지문학상(문학비평 부문) 수상. 2010년 제1회 질마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