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 산숙(山宿)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모밀가루포대가 그듣가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골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백석 시인 / 나와 지렝이
내 지렝이는 커서 구렁이가 되었습니다 천년 동안만 밤마다 흙에 물을 주면 그 흙이 지렝이가 되었습니다 장마지면 비와 같이 하늘에서 나려왔습니다 뒤에 붕어와 농다리의 미끼가 되엇습니다 내 이과책에서는 암컷과 수컷이 있어서 새끼를 낳았습니다 지렝이의 눈이 보고 싶습니다 지렝이의 밥과 집이 부럽습니다
백석 시인 / 하답(夏畓)
짝새가 발뿌리에서 날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어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늪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백석 시인 / 탕약(湯藥)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위에 곱돌탕관에 약이 끊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삭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백석 시인 / 외가집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북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쨩쨩 쇳스럽게 울어대고 밤이면 무엇이 기와골에 무리돌을 던지고 뒤우란 배나무에 쩨듯하니 줄등을 헤여달고 부뚜막의 큰솥 적은솥을 모조리 뽑아놓고 재통에 간 사람의 목덜미를 그냥그냥 나려 눌러선 잿다리 아래고 처박고 그리고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바닥에 넘너른히 널리는 집이다.
백석 시인 / 철새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알기 전에 이미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찾아 와 가을이 쓸쓸해질 때 떠나간다 언제나 먼저 떠났고 떠난 뒤 혼자 흘리는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 겨울은 철새가 되어 작정하고 돌아가지않는 겨울 철새가 되어 저문 들판에서 이삭같은 누런 내사랑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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