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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소월 시인 / 금(金)잔디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

김소월 시인 / 금(金)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기억(記憶)

 

 

달 아래 스ㅣ멋없이 섰던 그 여자,

서 있던 그 여자의 해쓱한 얼굴,

해쓱한 그 얼굴 적이 파릇함.

다시금 실벗듯한 가지 아래서

시커먼 머리길은 반짝거리며.

다시금 하룻밤의 식는 강물을,

평양의 긴 단장은 스ㅊ고 가던 때.

오오 그 스ㅣ멋없이 섰던 여자여!

 

그립다 그 한밤을 내게 가깝던

그대여 꿈이 깊던 그 한동안을

슬픔에 귀여움에 다시 사랑의

눈물에 우리 몸이 맡기었던 때.

다시금 고즈넉한 성밖 골목의

사월의 늦어가는 뜬눈의 밤을

한두 개 등불 빛은 울어새던 때,

오오 그 스ㅣ멋없이 섰던 여자여!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기회(機會)

 

 

강 위에 다리는 놓였던 것을!

나는 왜 건너가지 못했던가요.

`때'의 거친 물결은 볼 새도 없이

다리를 무너치고 흐릅니다려

 

먼저 건넌 당신이 어서 오라고

그만큼 부르실 때 왜 못 갔던가!

당신과 나는 그만 이편 저편서.

때때로 울며 바랄 뿐입니다려.

 

삼천리, 1934. 7

 

 


 

 

김소월 시인 / 길손

 

 

얼굴 흴끔한 길손이어,

지금 막, 지는 해도 그림자조차

그대의 무거운 발 아래로

여지도 없이 스러지고 마는데

 

둘러보는 그대의 눈길을 막는

쀼죽쀼죽한 멧봉우리

기어오르는 구름 끝에도

비낀 놀은 붉어라, 앞이 밝게.

 

천천히 밤은 외로이

근심스럽게 지쳐 나리나니

물소리 처량한 냇물가에,

잠깐, 그대의 발길을 멈추라.

 

길손이어,

별빛에 푸르도록 푸른 밤이 고요하고

맑은 바람은 땅을 씻어라.

그대의 씨달픈 마음을 가다듬을지어다.

 

배재, 1923. 3

 

 


 

 

김소월 시인 / 꿈 -1-

 

 

꿈? 영(靈)의 해적임. 설움의 고향.

울자, 내 사랑, 꽃 지고 저무는 봄.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꿈 -2-

 

 

닭 개 짐승조차도 꿈이 있다고

이르는 말이야 있지 않은가,

그러하다, 봄날은 꿈꿀 때.

내 몸이야 꿈이나 있으랴,

아아 내 세상의 끝이여,

나는 꿈이 그리워, 꿈이 그리워.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시인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정식이다. 오산 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 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상대를 중퇴했다. 당시 오산 학교 교사였던 안서 김억의 지도와 영향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의 봄」, 「그리워」 등을 발표하여 시인이 되었다.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누나야」, 「닭은 꼬꾸요」 등을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 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7·5조의 정형률을 바탕으로 한시를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저서로는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