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인 / 금(金)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기억(記憶)
달 아래 스ㅣ멋없이 섰던 그 여자, 서 있던 그 여자의 해쓱한 얼굴, 해쓱한 그 얼굴 적이 파릇함. 다시금 실벗듯한 가지 아래서 시커먼 머리길은 반짝거리며. 다시금 하룻밤의 식는 강물을, 평양의 긴 단장은 스ㅊ고 가던 때. 오오 그 스ㅣ멋없이 섰던 여자여!
그립다 그 한밤을 내게 가깝던 그대여 꿈이 깊던 그 한동안을 슬픔에 귀여움에 다시 사랑의 눈물에 우리 몸이 맡기었던 때. 다시금 고즈넉한 성밖 골목의 사월의 늦어가는 뜬눈의 밤을 한두 개 등불 빛은 울어새던 때, 오오 그 스ㅣ멋없이 섰던 여자여!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기회(機會)
강 위에 다리는 놓였던 것을! 나는 왜 건너가지 못했던가요. `때'의 거친 물결은 볼 새도 없이 다리를 무너치고 흐릅니다려
먼저 건넌 당신이 어서 오라고 그만큼 부르실 때 왜 못 갔던가! 당신과 나는 그만 이편 저편서. 때때로 울며 바랄 뿐입니다려.
삼천리, 1934. 7
김소월 시인 / 길손
얼굴 흴끔한 길손이어, 지금 막, 지는 해도 그림자조차 그대의 무거운 발 아래로 여지도 없이 스러지고 마는데
둘러보는 그대의 눈길을 막는 쀼죽쀼죽한 멧봉우리 기어오르는 구름 끝에도 비낀 놀은 붉어라, 앞이 밝게.
천천히 밤은 외로이 근심스럽게 지쳐 나리나니 물소리 처량한 냇물가에, 잠깐, 그대의 발길을 멈추라.
길손이어, 별빛에 푸르도록 푸른 밤이 고요하고 맑은 바람은 땅을 씻어라. 그대의 씨달픈 마음을 가다듬을지어다.
배재, 1923. 3
김소월 시인 / 꿈 -1-
꿈? 영(靈)의 해적임. 설움의 고향. 울자, 내 사랑, 꽃 지고 저무는 봄.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꿈 -2-
닭 개 짐승조차도 꿈이 있다고 이르는 말이야 있지 않은가, 그러하다, 봄날은 꿈꿀 때. 내 몸이야 꿈이나 있으랴, 아아 내 세상의 끝이여, 나는 꿈이 그리워, 꿈이 그리워.
진달래꽃, 매문사, 1924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용악 시인 / 전라도 가시내 (0) | 2019.10.02 |
---|---|
정지용 시인 / 정주성(定州城) 외 3편 (0) | 2019.10.02 |
백석 시인 / 나와 지렝이 외 5편 (0) | 2019.10.01 |
정지용 시인 / 조찬 외 3편 (0) | 2019.10.01 |
김소월 시인 / 개여울 외 4편 (0) | 2019.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