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김소월 시인 / 개여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30.

김소월 시인 /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

맘 없이 걸어가면 놀래는 청령,

 

들꽃 풀 보드라운 향기 맡으면

어린 적 놀던 동무 새 그리운 맘

 

길다란 쑥대 끝을 삼각(三角)에 메워

거미줄 감아 들고 청령을 쫓던,

 

늘 함께 이 동 위에 이 풀숲에서

놀던 그 동무들은 어디로 갔노!

 

어린 적 내 놀이터 이 동마루는

지금 내 흩어진 벗 생각의 나라.

 

먼 바다 바라보며 우둑히 서서

나 지금 청령 따라 왜 가지 않노.

 

학생계, 1920. 7

 

 


 

 

김소월 시인 / 고독(孤獨)

 

 

설움의 바닷가의

모래밭이라

침묵의 하루해만 또 저물었네

 

탄식의 바닷가의

모래밭이니

꼭 같은 열두 시만 늘 저무누나

 

바잽의 모래밭에

돋는 봄풀은

매일 붓는 벌불에 터도 나타나

 

설움의 바닷가의

모래밭은요

봄 와도 봄 온 줄을 모른다더라

 

이즘의 바닷가의 모래밭이면

오늘도 지는 해니 어서 져 다오

아쉬움의 바닷가 모래밭이니

뚝 씻는 물소리가 들려나 다오

 

신여성, 1931. 2

 

 


 

 

김소월 시인 / 고적(孤寂)한 날

 

 

당신님의 편지를

받은 그날로

서러운 풍설(風說)이 돌았습니다.

 

물에 던져 달라고 하신 그 뜻은

언제나 꿈꾸며 생각하라는

그 말씀인 줄 압니다.

 

흘려 쓰신 글씨나마

언문 글자로

눈물이라고 적어 보내셨지요.

 

물에 던져 달라고 하신 그 뜻은

뜨거운 눈물 방울방울 흘리며,

맘 곱게 읽어 달라는 말씀이지요.

 

1922. 7

 

 


 

 

김소월 시인 / 공원(公園)의 밤

 

 

백양 가지에 우는 전등은 깊은 밤의 못물에

어렷하기도 하며 어득하기도 하여라.

어둡게 또는 소리 없이 가늘게

줄줄의 버드나무에서는 비가 쌓일 때.

 

푸른 그늘은 낮은 듯이 보이는 긴 잎 아래로

마주 앉아 고요히 내리깔리던 그 보드라운 눈길!

인제, 검은 내는 떠돌아 올라 비구름이 되어라

아아 나는 우노라 `그 옛적의 내 사람!'

 

1922. 6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시인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정식이다. 오산 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 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상대를 중퇴했다. 당시 오산 학교 교사였던 안서 김억의 지도와 영향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의 봄」, 「그리워」 등을 발표하여 시인이 되었다.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누나야」, 「닭은 꼬꾸요」 등을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 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7·5조의 정형률을 바탕으로 한시를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저서로는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에서 나왔다.